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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신작 '만신 : 페이퍼 샤먼' 기자간담회샤머니즘은 샤먼을 중심으로 한 토속신앙으로, 수천 년 전부터 전 세계에 존재해왔다. 영적인 존재와 인간세계를 매개하는 샤먼은 ‘예민한 자’ 또는 ‘치유사’로도 불리며, 보통 사람의 복을 빌고 죽은 자의 넋을 위무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에서는 ‘굿’을 통해 풍년을 기원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도모했다. 우리 전통문화에 깃든 정신을 오늘날 감각으로 재창조한 신작을 통해 관객에게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할 것이다. "굿을 통해 상처받고 고통받은 세계 각지의 모든 생명과 영혼을 달래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고, 사람, 자연, 우주에 어떻게 모두에게 보탬이 돼고, 삶과 존재를 지켜나가기 위해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소박한 이야기예요. 그 도구가 한국의 샤먼, 해외의 사먼이 작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겁니다."국립창극단의 신작 '만신 : 페이퍼 샤먼'을 연출한 박칼린 감독은 29일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 작품을 제작한 이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공연계에서 활약하는 박칼린이 연출·극본·음악감독을 맡고극작가 전수양이 극본집필에 함께 참여했다. 이번 작품은 지난해 4월 부임한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유은선이 기획하고 선보이는 첫 신작이기도 하다. 유 감독은 "한국 고유의 음악극인 창극을 제작하는 국립창극단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신작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라며 "한국적인 소재를 현대적으로 풀어낼연출가를 찾던 중,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드는 박칼린이 떠올랐다”라고 밝혔다. '만신 : 페이퍼 샤먼'은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소녀 실이 강신무(신이 내려서 된 무당)가 되어 각 대륙의 비극과 고통을 마주하고 다양한 굿으로 치유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험한 힘을 지닌 주인공 ‘실’을 통해 만신(萬神, 무녀를 높여 부르는 말)의특별한 삶과 소명의식을 이야기한다. 1막에서는 남들과는 다른 운명을 타고난 소녀 ‘실’이 내림굿을받아 강신무가 되기까지를, 2막에서는 만신이 된 ‘실’이 오대륙에서 건너온 샤먼들과 긴 여정을 함께하며각 대륙의 비극과 고통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을 담아낸다.대서양 노예무역의 고통을 겪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부터 서부 개척 시대에 희생당한 미국 원주민, 6‧25전쟁이 남긴 역설의 공간 비무장지대(DMZ)에 서식하는 동물, 열대우림 파괴로 사라져간 아마존 원주민 부족 등 수많은 생명의 영혼을 보듬고 치유하기 위한 굿이 다양한 형태로 펼쳐진다. 여러 명의 소리꾼이 무대에 올라 창(唱)으로 이야기를 엮는 만큼 음악은 다채롭게 구성했다. 한국의 판소리와 민요, 민속악을 근간으로 만든 소리를 중심에 두고, 무가(무속 의식에서 무속인이 구연하는 노래)와 각 대륙의 토속음악을 가미했다. 1995년 뮤지컬 '명성황후' 뮤지컬 음악감독으로 데뷔한 박 감독이 연출과 극본, 음악을 맡아 무대를 지휘하고, 한국을 대표하는 대명창 안숙선이 작창, 유태평양이 작창보를 맡아 동서양을 아우르는 새로운 음악을 선보인다. 주인공 실은 국립창극단원인 김우정과 박경민이 연기한다. 판소리와 민요를 토대로 우리 전통 무속음악과 세계 각 지역의 다양한 무속음악을 접목했다. 이번 작품은 박 감독의 첫 창극작이다. 국립창극단의 연출 의뢰를 받고 도전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하는 창극단이 다른 대륙의 음악을 하는 것이 적절한 지에 대한 고민도 있었다"그러나 "샤머니즘의 원초적 음악은 느낌과 시원이 다르지만 목적에 있어서는 공통점도 많다"고 말했다. 한편 박감독은 박동진 명창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그는 "뮤지컬 기법을 창극에 접목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며 "대본을 토대로 충실하게 음악을 연출했다"고 말했다. 이어 '공포 속의 행복함'이 가장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고 덧부쳤다. 작품의 큰 줄기인 무속문화와 샤머니즘은 박 감독의 가정환경이 바탕이 됐다.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불교와 토속신앙에 기반을 둔 가정 환경에서 자라서 자연스럽게 샤머니즘을 접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살 때 동네에서 굿 하는 것을 많이 봤고 어머니 집안에도 샤먼들이 많이 계셨어요. 그래서 (샤먼은) 저한테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작품의 주인공 ‘실’ 역에는 김우정과 박경민이 더블 캐스팅됐다. 2020년에 입단한 김우정은 맑은미성의 소유자로, 창극 '춘향'의 ‘춘향’ 역과 '정년이'의 ‘권부용’ 역을 맡아 주목받았다. 지난해 10월 입단한 박경민은 이 작품을 통해 첫 주역으로 데뷔한다. 두 배우 모두 ‘실’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따라가면서 강신무로서 무아의 경지를 표현하기 위해 맹훈련을 거듭하고 있다. 모든 것을 품으라는 뜻의 이름처럼, 모든 생명을 지키고 평화를 비는 ‘실’의 커다란 힘을 어떻게 소화해 낼지궁금증을 자아낸다.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한국적 미학을 극대화한 무대다. '만신 : 페이퍼 샤먼'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한지를 활용해 무대 구조와 의상을 만들었다. 주인공이 실이 마지막 장면에서 입는 옷 역시 한지로 제작됐다."종이는 기록이다.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는 매체인 동시에 물과 불을 만나면 사라진다. 이런 부분이 인간의 인생과 비슷하다, 이승과 저승, 과거와 미래 등이 이 얇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 활용했다.실제 굿에서도 무구(巫具)를 종이로 직접 제작하는 작업을 중요한 의식 중 하나로 여긴다." 며 "주인공 실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종이 옷을 입는 것으로 연출한 것도 이런 이유"라고 박감독이 설명한다. 해외 진출 계획도 밝혔다. 유은선 예술감독 겸 단장은 "K-문화가 전세계적으로 부상하고 있다. 지금 이러한 전성기에 전통 부분에서 모티브를 찾게 되었다"고 말했다.'만신 : 페이퍼 샤먼'은 오는 6월26~30일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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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패랭이 쓰고 큰북 메고~얼쑤, 그리운 김법국 단장님기미양(아리랑학회 이사) 지난 3월 초 한 여성 국악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움과 애석함을 담은 간절한 목소리였다. "우리 김뻑국 선생님 가신지 2주기가 이번달 18일인데, 아무도 몰라주네요. 국악신문이 기념식 같은 것 못 하나요? 코로나도 끝났는데~” 아마도 2022년 3월 21일 자 국악신문 부고기사를 보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세상을 멈추게 하는 코로나 중이어서 유일하게 국악신문만 부고 기사를 냈기 때문이다. 그동안 종로 3가 국악로 로터리 ‘김법국예술단’ 사무실은 최고 원로 송해 선생으로부터 10대 소리를 배우려는 아이까지 사랑방처럼 들리는 곳이었다. 언제나 빙그레 웃으며 맞아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이 가신지 2년을 맞는 시기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2주기가 되는 3월 18일 몇몇 지인들과 이 소식을 나눴다. 모두 공감을 표했다. 그래서 금년에 국악신문이 앞장서서 기념사업을 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더 많은 지인들의 뜻을 모아 기념사업회든 기념 시상제도든 결성하자고 합의하였다. 4월 중순경 ‘아리랑연합회’가 나섰고,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나섰다. 이렇게 하여 국악신문을 포함하여 3자가 만났다. 그 결과 첫 회는 조직과 기금 마련 등이 어려우니 국악신문 주최의 기념상을 제정하여 첫 회 수상자를 배출하고, 내년에 기념사업과 제2회 시상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상명은 ’김법국국악상‘으로, 수상은 5월 중 공고하고 심사하여 5월 중 시상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난 5월 1~4일까지 공고를 하고, 응모자 4인을 대상으로 12일 심사를 하고, 26일 시상식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기념상 일정을 잡고 나니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선생과 필자는 20여 년 전 CD 10장짜리 음반 ‘3代 정선아리랑’(신나라 레코드)을 내고, 이를 기념하여 ‘SBS토요무대 김순녀 정선아리랑’이란 발표회 겸 특집방송을 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음반의 주인공 김순녀 선생이 ‘김법국예술단’ 주역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스승 이창배 선생의 탑시(塔詩) 액자를 중앙으로 하고, 역대 국악 명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속에서 국악인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곳이었다. 그 특유의 제스처를 써가며 배꼽잡게 하는 약장사 시절의 에피소드며, 가슴을 찡한 배고픈 시절 웃음 품앗이 ‘딴따라’ 시절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선생의 정확한 연대기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선생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늘 만날 때마다 메모를 하고, 오랜 교유 관계의 지인이 전 종로문화원 반재식 원장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이사의 얘기 대로라면 대략 이렇다. 50년대 이전, 60, 70년대 인천 생활, 80년대 이후 김법국예술단 운영, 2000년대 말년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선생의 본명은 김진환(金鎭煥)이다. 송해 선생의 증언으로는 1962년 KBS 성우로 잠시 일했는데, 효과음으로 뻐꾸기(암수 각각 우는 소리와 과부 뻐국이가 우는 소리)소리를 잘 내서 별명으로 부른 것이 ‘김뻑국’이라고 불려졌고, 이를 한자로는 ‘김법국(金法國)’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은 일본이고 1937년생이다. 9살 때 원폭투하를 목격한 뒤 귀국, 부친의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우리말이 서툴고 일본에서 왔다고 하여 ‘왕따’를 당해 졸업도 못하고 서울로 왔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역에 내려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뚝섬 근처에서 국악인 이충선 씨를 만나 1년6개월 동안 머슴생활을 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용인으로 피란을 갔다. 전쟁말기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국악인들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노숙을 했다. 여기서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 씨에게 일을 시켜달라고 매달렸다. 그래서 장구와 피리를 어깨 너머 배우면서 ‘약장수’ 생활을 했다. 주로 경기도 일대를 돌며 ‘구루무’(크림) 등을 팔며 공연을 하였다. 이 시기 틈틈이 이창배 선생한테 경기민요를 배우고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을 만나 무대도 섰다. 이렇게 유년의 50년 대는 험란한 시기지만 국악을 배우고, 국악인들을 만나 활동을 하게 된 시기이다. 1960~1970년대 초까지 인천 내동과 신포동의 신흥목공소에 주소를 두고 주로 인천지역의 인천극장, 문화극장, 현대극장에서 소리와 만담을 소시민들에게 전했다. 동행은 만담 콤비 장소팔과 고춘자, 재담가 김영운과 배뱅이굿의 이은관, 탈춤의 양소운, 소리는 이창배 문하의 김옥심, 이은주, 최창남 등이었다. 선생은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쇼를 알리는 포스터를 벽에 부치러 인천 시내는 물론 주안 일대까지 다녔다. 그리고 표를 팔고 무대청소를 하고 출연까지 했다. 이때부터 패랭이 쓰고 몸집만 한 큰북을 앞으로 매고 만담과 소리와 코로 대금을 부는 등 장기를 발휘했다. 이 것이 인천시대이다. 1980~1970년대 중반에 들면서 ‘김뻑국’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시기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였다. 김 선생은 이은관 선생과 함께 종로 3가에 있는 요정으로 나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 부장이 북한을 무사히 다녀온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는데, 김지미·서수남·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다들 얌전하게 불렀다. 그러나 김 선생은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라는 청춘가 한 대목을 불러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이 부장은 "바로 이거야, 이런 사람 세 사람만 있으면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지.”하면서 김법국 선생을 옆자리에 앉힌 뒤 백지수표(100만 원 이하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돈은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 바로 이 돈으로 ‘김뻑국예술단’을 차렸다. 그리고 묵계월·최창남·김덕수·임이조 등 이름있는 국악인들을 출연시킬 만큼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 특히 전방부대와 노인단체 위문공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김뻑국예술단’의 활동은 90년 대까지 이어졌다. 이때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담의 명인’으로 불렸다. 이때 노인들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공연을 열면서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부 활동에 대해서 노태우 대통령 표창장(1998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1994년), 국방부 장관상(1996년), 김대중 대통령 감사패(1998년) 등 많은 표창장과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신의 공연보다는 후배들의 무대를 마련해 주는데 힘썼다. 그리고 ‘정선아리랑전수소’를 거의 무료로 운영하여 아리랑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특히 기획사 업무도 하며 노년을 보냈다. 이 시기 특별히 주목되는 활동은 반재식 원장을 통해 ‘국악로’를 제정하게 한 일과 최창남 선생을 보유자로 지정받게 하는데 역할을 해주셨고, 1996년 만담보존회를 꾸려 김용운 선생을 회장으로 모셔 전승활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시기 두 번이나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완쾌후 건강을 되찾고 20여 년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2022년 3월 코로나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다. 마지막 제자로는 정선아리랑 명창 김순녀 여사가 있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홍익대 미대를 나와 사업가로 활동 중이라고 전한다. 이렇게 주마간산 격으로 2주기를 보내며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봤다. 아, 김법국 선생님. 내일 오후 쯤 종로3가 지나서 '국악의 거리'에 나가면, 그 텁텁한 목소리와 인자한 미소에 패랭이 쓴 모습으로 마주칠 것 같다. 국악로 거리를 지나면 생각이 나는 분이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먼저 인사를 하시는 분이다. 한 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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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진전, '한국·이탈리아 140년 우정의 역사'문화체육관광부 유인촌 장관은 26일 오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 기념 사진전-모든 길은역사로 통한다,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 개막식에 참석해 내외빈을 환영하고주한 이탈리아대사관 에밀리아 가토(Emilia Gatto) 대사 등을 만나 한국과 이탈리아 상호문화교류 활성화를 약속했다. 유인촌 장관은 환영사에서 "이탈리아의 조르지오 모로더가 작곡하고 한국의 코리아나가 부른 ‘손에 손 잡고’는 지금도 올림픽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제곡으로 손꼽힌다. 이번 전시는 이처럼 역사적인 양국의 순간들을담고 있다. 지난해 양국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2024~2025 한국-이탈리아상호문화교류의 해’를 선포했다. 이번 사진전은 그 여정의 힘찬 출발이기도 하다.사진전을 찾은 관객들이 양국이 함께 걸어갈 미래를 그려보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에밀리아 가토 대사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사진전에서 과거뿐 아니라 양국 관계의 미래를 위한 견고하고 확실한 기반이 될 소중한사진과 문서를 소개하고 있다. 이 전시가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공통의가치와 목표를 가진 두 나라의 유사성을 조명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라고화답했다. 이번 개막식에는 ▴한-이탈리아 의원친선협회 회장인 홍영표 의원, ▴외교부홍석인 공공외교대사, ▴주한 이탈리아문화원 미켈라 린다 마그리 원장, ▴로마시립예술원 석좌교수인 임형주 성악가, ▴이탈리아 출신의 인기 방송인 엘베르토 몬디,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현재 흥국생명 여자배구단을이끄는 마르첼로 아본단자 감독 등이 함께했다. 문체부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한 이탈리아대사관, 연합뉴스, 안사(ANSA)통신사, 주한 이탈리아문화원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기념 사진전은 2월27일(화)부터 3월 31일(일)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3층 주제관에서 열린다.1884년 조이수호통상조약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양국 교류관계 사진 10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는 이번 사진전에서는 특히 6·25전쟁 당시 한국에 파견된이탈리아 제68적십자병원 활동 관련 사진과 영상을 처음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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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으로 간 최순이"조선시대 진주 최고의 예인 칼춤으로 고종 앞에 선 열세 살 소녀, 궁중 관기에서부터 근대 신여성, 기생의 삶까지 논픽션과 픽션을 넘나드는 한 여성의 인생 이야기"가무 그것은 예술이며, 우리는 예술가로소이다.”-『장한』 기생들이 창간한 잡지 중에서이 책은 조선시대에 태어나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현대를 거치며 관기의 삶을 살아온 한 여성에 대한 대서사다. 또한 훗날, 궁중의 검무를 국가무형문화재 ‘진주검무’로 전승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최순이에 대한 ‘헌사’이자 조선시대 전문 예술인이었던 기생에 대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집필되었다. 자주적이며 예술에 헌신적이기까지 했던 조선의 ‘관기’. 남성을 위해 살았던 ‘도구’로서가 아닌, 높은 수준의 가무를 익혔던 전문가로서의 그녀의 인생을 다시 정의한다. 책의 전반부는 최순이의 궁중 생활기다. 그녀가 진주에서 상경하여 궁중의 관기가 되고, 일제강점기, 더 이상 연회가 열리지 않자 낙향하여 진주 권번의 스승이 되기까지의 그녀의 인생을 시간 순서대로 서술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 말과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궁중 연향(연회) 모습도 묘사한다. 일제강점기, 연회 담당 인원을 줄이면서 궁중 악사가 무동의 역할까지 하는 과정, 프랑스 왕실 못지않은 조선 왕실 연향의 격식과 예에 맞춘 초호화 궁중음식 코스, 화려한 꽃장식, 그리고 연회에 참가했던 모든 여령이 왕과 같은 종류의 음식을 대접받았던 사실까지, 그 사료를 찾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책은 '의궤'와 진찬도병(그림) 등의 기록을 고증하여 궁중의 무희들이 어떤 종류의 춤을 추었고, 몇 명이 추었는지 어떤 복식을 했는지 흥미롭게 서술한다. 독자들은 책을 읽으며 마치 궁중의 연향에 참가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후반부는 조선의 왕실에서 더 이상 연향을 하지 않자, 설 자리가 없어진 관기들이 궁에서 나와 요릿집에 취업하거나, ‘기생조합’을 만들어 직접 운영하고 경제 활동을 한 이야기다. 조선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하는 기생들의 일생을 좇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폐허가 된 1950년의 진주성까지 마주하게 된다.' 최순이를 비롯한 진주 기생들은 모의당이라는 공간에서 의기창렬회를 조직하여 다시금 논개의 제를 지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들은 6.25전쟁 가운데서 개최된 예술제인 영남예술제(개천예술제의 전신)에서 국립국악단원과 함께 다시금 무용을 선보인다. 시, 서, 화와 인문교육을 받았던 궁중의 관기 출신 기생들은 자주적이며 능동적이었다. 그들은 노동 환경을 개선해 줄 것과 매출을 공개해 줄 것을 사용자 측에 요구하면서 파업하기도 했다. 그들은 예술을 통해 경제 활동을 하는 노동자였으며,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했던 신여성이었다.최순이는 평양이나 서울의 요릿집 대신 낙향하여 진주의 기생조합에서 궁중에서 배운 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로 마음먹는다. 최순이가 스승의 길을 걸으면서, 최순이 인생 2막이 시작되었으며, 훗날, 이 결정은 진주검무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교방문화라는 꽃을 피워내는 데 씨앗이 된다. 국가무형문화재인 진주검무 이수자인 저자는 최순이에 대한 자료와 궁중 교방 문화에 대한 방대한 학식으로 최순이의 인생을 복원해 내는 데 성공했다. 저자는 최순이가 직접 가르쳤던 권번 제자들과 김천흥이라는 궁중 악사가 최순이가 진주검무를 전승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말해준다.올해 2023년은 진주에서 천한 신분인 백정이 형평운동을 시작한 지 100년째 되는 해다. 백정은 형평운동을 통해 그 신분이 해방되었다. 그러나 천민 신분인 백정과 기생, 그들은 여전히 신분에 따른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유독 기생은 아직 단순히 성(性)을 팔고 술을 따르는 이미지로만 소비된다. 이 책은 기생의 예인으로서의 면모를 부각하고자 했다. 전문 예술인이었던 관기가 아니었다면 궁중의 춤과 노래는 다음 세대에 전승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권번 문화가 들어오면서 일제는 기생을 풍기문란한 존재로 편견을 조장한다. 1941년 일본이 전시 체제로 돌입하면서 ‘기생’이라는 이름이 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접대부’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생=접대부’라는 등식이 생겼다. 1910년 이전의 관기, 선상기, 여령과 같이 전문예술인에 해당하는 한국 기생의 참 의미는 사라졌다. 기생이라는 단어의 오염은 일제에 의해 주도되었다.진주검무, 국가무형문화재로 재탄생하다오늘날 관기를 재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조선의 연향 문화를 습득한 예술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조선의 체계적인 학습 시스템을 통해 궁중 연향에서 행해지는 모든 퍼포먼스를 익혔으며, 가·무·악과 시·서·화 심지어 예절 교육까지 받았다. 이는 관기 개개인에게는 혹독하고도 힘든 과정이었으나, 아름답고도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최순이가 평생 제자를 가르친 이유도 이 궁중의 춤이 후대에 널리 전승되기를 간절하게 원했기 때문이다. 1969년, 최순이는 숨을 거둔다. 그녀의 곁에는 몇몇 기생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갑 안 서랍장 안에는 몇 장의 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조차 그 유품을 챙길 여력이 없었다. 자신들이 그동안 해왔던 일이 결코 자랑스럽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최순이는 쓸쓸하게 마지막을 맞이했다. 진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진주검무’라는 꽃을 피우고 흙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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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신과 영화의 길시인이자 영화평론가, 영화사연구자로 평생을 살아온 국헌 김종원의 회고록이다. 1937년 제주에서 태어난 김종원은 1957년 《문학예술》과 1959년 《사상계》로 추천을 완료한 제주 출신 1호 등단 시인이다. 학생 시절 소년시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제주의 대표적인 학생문예지 《별무리》의 편집을 맡았으며 제주 최초의 시전문지 《시작업》의 발간을 주도하는 등 전후 제주의 문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1959년 영화평론을 시작하여 196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설립을 주도했으며 현재까지 현역 영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영화평론계의 산증인이자 『우리영화100년』과 같은 저서를 쓴 한국영화사 연구의 한 획을 그은 권위 있는 연구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김종원의 삶에 새겨진 흔적과 그가 만난 사람들을 통해 우리 현대사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이다. 제주 출신 첫 등단 시인 김종원 전쟁을 피해 제주로 온 계용묵 등 저명 문학, 예술인들의 영향으로 4.3으로 피폐해진 제주 문화계에 새로운 싹이 트기 시작했다. 1952년 12월 《학원》잡지를 통해 그 이름을 전국에 알린 학생문사 김종원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국문과에서 수학하며 《문학예술》(1957.5.)과 《사상계》(1959.2.)를 통해 시인으로 정식 등단하였다. 제주 출신 1호 등단 시인이라는 영예를 지닌 그는 중학시절 제주 최초의 학생잡지《별무리》(1953.12.)를 편집하였고, 제주 최초의 시전문지 《시작업》(1959)의 발간을 주도하며 1950년대 제주 문화계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이뿐만 아니라 엔솔로지 시집 『신풍토』(1959) 동인 및 "60년대사회집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강냉이사설』(1970)과 『광화문행』(1988), 『시네마천국』(2023) 등 세 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이 책은 제주 출신 시인 김종원의 문학 인생을 살펴 볼 수 있다. 1950~60년대 명동 시대의 주역 1950-60년대 명동은 젊음과 낭만이 넘치는 문화의 거리였다. 전후의 피폐한 거리에 들어선 수많은 다방과 음악감상실에는 저명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물론 서울 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이 모여 젊음을 꽃피웠다. 이곳 명동은 전후 우리 문화의 심장부이기도 했다. 각종 신문과 잡지의 원고청탁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연극, 영화가 기획되었고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열렸다. 이 시기 명동을 거쳐 간 수많은 인물 중에 김종원도 있었다. 그는 공초 오상순 선생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던 "청동문학”의 중심인물로 오상순 선생의 추천으로 잡지《녹원》(1957)을 편집하였으며, 동성영화사에서 일을 하며 영화를 기획했다. 이 책에서는 명동을 중심으로 모여든 수많은 인물들을 김종원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 격동의 현장을 몸으로 겪다 : 4.19 혁명과 조선투위 참여 김종원은 1947년 제주 3.1절 행사를 비롯해 6.25전쟁, 4.19혁명, 유신과 80년 서울의 봄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으로 겪었다. 이 책에서는 제주 4.3 당시 제주민전 위원장 안세훈을 만났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부터 목포에서 겪은 6.25 당시 상황, 시위대의 한복판에서 활약했던 4.19혁명 전후의 이야기,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자유를 부르짖다 해직된 "조선투위” 활동, 1980년 태창문화사에 근무하던 당시 재야의 거두 김대중의 자서전을 출판하려던 일 등 우리 현대사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영원한 현역”이고 싶은 영화평론가 1959년 종합잡지 《자유공론》에 실은 "한국영화평론의 위기와 과제”를 시작으로 60여 년의 세월을 영화평론가로 활약한 그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1965)를 조직하여 3대 회장(1981)을 역임하였으며 《씨나리오문예》, 《씨네팬》, 《실버스크린》, 《영화예술》 등 여러 영화 관련 잡지의 발간에 관여하였으며 1964년에는 시인 김규동이 발행하던 《영화잡지》의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86년 손석희와 공동으로 진행했던 《퀴즈,명화여행》을 비롯해 영화평론가로서 다수의 방송매체에 출연하여 영화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맡아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이 책에는 영화평론가로 영화잡지 발간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 영화평론가협회의 운영에 관한 이야기, 영화의 등급을 매기는 심의 활동에 관한 사항 등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영화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려준다. 영화사가에서 이제는 한국영화사의 증언자로 1990년 무렵 대학 강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인 영화사 연구의 길에 들어선 김종원은 『우리영화 100년』 등 저명한 영화사 서적과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여 한국영화사 연구의 권위 있는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영화 도래에 관한 사항, 한국영화의 기점에 관한 사항, 춘사 나운규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이끌면서 한국영화사 연구의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이뿐 아니라 이제는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의 제작현장과 평론계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가 후학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제공하는 등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영화사의 재료이며 그의 글은 중요한 참고문헌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그가 겪었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 한국영화의 황금기에 관한 디테일한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저자 김종원 1937년 제주 출생. 시인. 영화평론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57년 《문학예술》, 1959년 《사상계》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1959년 영화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65년 창립된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발기인이자 3대 회장을 역임했다.(1981.02.01.~1982.01.31.) 학원사와 조선일보사에서 근무했으며 1975년 자유언론 수호를 위해 조선투위에 참여하여 강제 해직 당했다. 이후 공연윤리위원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심의위원 역임했으며 인하대, 동국대, 청주대, 한국예술종합대학 영상원 등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청룡영화상 제1회 정영일영화평론상,(1994.12), 제주도 문화상(예술부문)(2000.12.), 한국예술발전협회 주최 제1회 ‘한국예술발전상’(2001.12.),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특별 공로예술가상(영화평론)(2007.12.), 영평상 영화인 공로상(2020.11.) 등을 수상했다. 한상언영화연구소 한상언영화연구소는 남북한 영화 및 동아시아 영화 자료의 체계적 수집과 전시, 연구를 위해 2018년 4월 설립한 학술연구기관이다. 현재 본 연구소에는 북한에서 발행된 단행본과 잡지 등, 총 5,000여점이 넘는 문헌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 북한에서 발행한 문학예술 도서 250점을 전시하는 <평양책방>을 2018년 서울도서관에서 개최하여 국내외의 큰 관심을 받았다. 또한 2020년에는 한국영상자료원 영화박물관과 함께 <혼돈의 시간 엇갈린 행로-해방공간의 영화인들>이라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기념전시를 개최했다. 연구소의 주요 출판물로는 『평양책방』(2018), 『월북영화인 시리즈 1~3권』(『문예봉 전』, 『강홍식 전』, 『김태진 전』)(2019), 『멜랑콜리 연남동』(이효인 저), 『영화운동의 최전선』(2022), 『스탈린거리의 평양책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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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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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농요'를 남기신 나의 아버지 김 종술아버지께서는 1929년 10월, 물 맑고 공기 좋은 진양군 사봉면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유난히 유교적인 풍습이 많이 남아있던 마을에서 그리 풍족하지는 않지만 인내와 성실을 몸소 실천하시며 유년시절을 보내셨습니다. 6.25전쟁 발발 이듬해인 1951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참전용사로 7년간이나 군대생활을 하셨습니다. 군복무 중이던 스물여덟살에 결혼을 했지만 신혼의 단꿈은 고사하고 어무이(홍 복남)를 몇 년간이나 독수공방 시키셨다고 합니다. 군제대와 함께 보금자리를 찾아 자리 잡은 이곳 함안이 제2의 고향이 되었고, 이때부터 아버지께서는 농요에 애착을 가지시고 매우 즐겨 부르셨습니다. 함안지역 읍,면 곳곳에 전해오던 대부분의 보리타작. 모심기, 논매기 농요들을 모두 섭렵하게 되셨습니다. 슬하에 6형제를 두고 자식들에게는 어른을 공경하라 가르치시고, 예의바름을 강조하시며 언제나 성실하고 부지런한 자세로 저희를 키우셨습니다. 자식에게만큼은 엄했던 아버지는, 가끔은 저에게 자립심을 길러주시려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고질병인 위궤양 때문에 술을 일찍 끊으셨지만 한때는 술 도매상 일을 하시면서 약주를 즐겨 하셨는데, 어린 시절 저는 주전자에 막걸리를 사오면서 한모금씩 먹어보기도 하여 술심부름이 싫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평소에 아버지께서는 건축 감독일과 농사일을 함께 하셨는데, 새마을 운동이 시작될 때 올바른 국가관으로 지붕개량과 통일벼 재배를 마을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시면서 좋아하시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외에도 여러 일들을 도맡아 하셨는데, 김해김씨 문중의 어른으로서 종친회장을, 2005년부터는 가야읍 본동 노인회장을 지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로부터 마을에서 전래되어온 우리선조들의 땀과 애환이 서린 소중한 농사 일소리와 농사일 모습을 살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만들어진 함안농요보존회에서 함께 활동을 하시고, 2008년 4월 담도암으로 투병중이면서도 아라제 함안농요발표회에 어무이와 함께 참가하셨습니다. 항상 성실하고 바르게 살 것을 당부하시며,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시고 2008년 6월, 80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날 수많은 조문객들이 찾아주셨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떠나시고 4년 후.2012년 10월, 제53회 한국민속예술축제에서 함안군 함안농요보존회의 '함안농요'가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는데, 더불어 개인부문 연기상인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도 어무이께서 수상하시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함안 향토민속문화의 우수성, 함안지역만의 독특한 메나리조로 선조들의 삶을 마당놀음 형태로 구현한 ‘함안농요’를 전국으로 알렸습니다. 2016년 함안농요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9호 지정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이 날을 잊을 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노래이기도 합니다. 노래는 아버지의 삶의 일부가 되셨습니다. 함안농요 속에 아버지는 살아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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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근대 전반기 대구지역춤의 전승 인맥(人脈) 고찰Ⅰ. 대구지역춤의 생태문화적 환경 대구는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중남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두대간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더위는 심하고 기간도 길고 봄이 짧으면서 계절의 변화가 급속한 전형적인 대륙성기후를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배경으로 형성된 영남북부의 교통, 문화, 교육의 중심지이다.또한 대구인들은 뛰어난 적응력과 강안한 개척정신, 의리와 결단력을 매우 중시하여 든든한 느낌이 든다. 배타적이고 무뚝뚝한 점도 있지만 애교있는 여성도 많고, 대도시라 그런지 덜 폐쇄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수성과 선비정신이 높은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지리와 기후환경적으로 대구지역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분지기후(盆地氣候)를 이루고 있어 분지 내부의 복사열 등의 더운 기온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여 대체로 비가 적고 매우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겨울은 덜 추운 지역이다.또한 역사문화적으로 넓게는 신라문화권에 속하며, 행정적으로는 영남북부문화권, 민속적으로는 백중문화권(단오 추석문화권), 내륙문화권이라는 광역적 성향도 기저에 깔려 있다. 따라서 대구지역만의 독특한 춤문화를 형성하고 발전시켜 미시적으로는 대구지역춤이며, 광역적으로는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면서, 거시적으로 한국춤계의 중요한 춤문화권과 영향력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근대시기 6.25한국동란으로 일시적이나마 대구에 중앙국립극장이 옮겨지면서 수많은 예술인과 무용들이 집중되는 현상으로 문화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었고 그 영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번 대구에서 펼쳐지는 세계안무페스티벌과 안무학술포럼을 통해 대구지역춤의 역사와 춤인물과 인맥과 현황을 고찰함으로써 대구지역춤의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한국춤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고 미래춤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조선조 전통문화시대를 지나 1900년대 초부터 1960년대 이전까지 서구문명과 외래문화의 범람시기에 대구지역을 중심으로 소멸되어가던 전통춤 전승에 수구적(守舊的)이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인 춤인맥을 고찰하고, 또한 시대조류에 따라 새롭게 형성되는 국제적인 근대춤 정착에 헌신한 춤인맥을 살펴 대구지역춤의 전승과 무용사적 의의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심도있는 연구가 아닌 포럼이기에 아쉽지만 개괄적인 고찰에 머물 것이며,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그간 대구춤과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과 평문 등을 일별하여 요약문을 작성하였다. 대구지역춤 관련한 학위 및 학술논문 등은 한국교육학술정보원(RISS)을 검색어를 통한 문헌 내용과 필자 소장문헌을 중심으로 고찰 정리하였다. 또한 대구무용계의 여명기를 개척한 1세대를 중심으로 뒤를 이은 2세대에 한하여 20세기 초중반기(개화기부터 1960년대까지) 무용인물을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Ⅱ. 대구지역춤의 근대사적 배경 전통시대(조선조)의 춤은 대체로 궁중춤(정재, 일무), 민속춤(예인춤, 민간춤), 종교의식춤(불교춤, 무속춤) 등으로 전승되어 왔지만 우선 관심의 대상은 기방춤으로 궁중과 선상기(選上妓)로 활동하던 지방관기 전승의 교방춤과 기방춤으로 전승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와 한일합방의 급변속에서도 20세기(1900년대) 근대초기 관기제도의 폐지와 기생조합과 권번의 등장과 궤를 같이하며 경향 각지에서 나름의 전승체계와 색다른 공연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개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기생조합은 1904년 10월 10일 일본공사관의 제3호 경성관령으로 비롯된 창기 창녀의 사회적 공식화부터 비롯된다. 궁내부 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시행된 1905년 여악(女樂)의 폐지, 1908년 7월에 ‘향사이정조칙(享祀釐正詔勅)’으로 관기들이 소속된 태의원(太醫院)의 의녀(醫女)나 침선비(針線婢) 등이 해체되면서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그해 8월 24일에 장례원 장악과가 해체되었다. 아울러 1908년 9월 15일 기생 및 창기 단속령과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 제정 등에 의해 우리나라에 적용한 일제의 공창화(公娼化) 정책에 의해 설립된 전국의 기생과 창기들의 동업조합이 곧 ‘기생조합’이다. 한편 기생조합소는 기업(妓業)을 주관하는 사업체 및 운영 사무실을 지칭하는 것인데, 초기에는 기생조합 또는 창기조합이라고 불렸다가 1917년경부터 일본식으로 ‘권번(券番)’이라 바뀌었다. 한국의 근대화의 물결과 근대춤의 시작은 대체로 1900년 전후로 나타난 세계사적 물결과 주변국과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조선시대 말 갑오경장(1894년)과 대한제국시대에 거스를 수 없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문화조류가 파급되면서부터이다. 1902년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협률사(協律社)가 경성에 설립되어 그해 12월 4일부터 <소춘대유희(笑春臺遊戱)>가 공연되었다. 그후 1907년 광무대(光武臺), 단성사(團成社), 연흥사(演興社), 1908년 장안사(長安社) 등 극장이 개설되었고, 광무대에서는 관기(官妓)의 가인전목단·검무(劍舞)·남무(男舞)·무고(舞鼓)·무동·성진무(聖眞舞)·승무(僧舞)·시사무(矢射舞)·이화무(梨花舞)·전기광무(電氣光舞)·지구무(地球舞)·한량무(閑良舞)등과 같은 춤 종목은 활동사진과 함께 광무대의 무대에서 공연됐다. 1915년 결성한 경성구파배우조합(京城舊派俳優組合)과 손잡고 광무대 7주년기념공연으로 새로 선보인 고구려무(高句麗舞)·공막무(公莫舞)·첨수무(尖袖舞) 등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톡청년학생음악단 내한공연(1921), 이시이 바쿠 내한공연(1926), 최승희의 <세레나데> 공연(1927), 배구자의 <아리랑> 공연(1928) 등으로 무용공연 등이 본격적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한국의 근대춤이 이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후기 대구 관기들의 활동 배경을 살펴보면, 임진왜란(1592-1598) 이후 대구지역에 감영 설치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경주-상주로부터 이어져 온 감영이 옮겨오게 되었다. 곧 1601년(선조34년)에 경상감영이 대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구는 경상도의 중심적 거점도시로 변모되면서 많은 국가적 지역적 행사가 많아졌다.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에 소속된 관기(官妓)들의 공적(公的)인 악가무 활동이 활성화 되었던 것이다. 경상도와 관련되는 국가적 행사는 경상감영이 주관하여 이루어졌고, 대구와 관련되는 지역적 행사는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이 도맡아 행사를 치루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는 같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지금의 중구 포정동에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전 중앙공원) 일대이다. 영조 43년(1736년)에 작성된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는 경상감영의 부속건물로 교방과 취고수방(吹鼓手房)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1768년에 발간된 『대구읍지大丘邑誌』1)에 의하면, 경상감영 교방(敎坊)에는 41명의 예기(藝妓)가 있었고, 대구부에는 31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또한 1888년에 자인현감 오횡묵(吳宖黙)이 적은 『자인총쇄록(慈仁叢鎖錄)』에 의하면, 경상감영 관하방(觀下房)에는 21명의 기생이 있으며, 대구부에는 17명의 기생이 영영교청(嶺營敎廳)에 소속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당시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에 소속된 관기들은 악기, 노래, 춤 등 각종기예를 익혀 각종 공적인 연회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상도 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대구부의 교방기생 31명과 관노 40명, 대구감영의 교방기생 35명과 관노 81명의 기록이 보인다. 그후 대구기생 향선(香仙)을 비롯한, 남수(藍水), 죽선(竹仙), 화월(花月)이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했음도 확인된다. 이와같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부터 실질적으로 관기제도가 폐지(직제상 페지는 1908년) 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사회로 진출한 관기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 바로 1910년 5월에 결성한 ‘대구기생조합’이다. 또한 1905년 경부선 철로가 개통된 이후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상업성을 가지고 자금을 투자하면서 1922년부터 ‘대구권번’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1월에는 한국인들의 주도로 관기 출신의 염롱산(廉隴山)을 권번장으로 하여 ‘달성권번’이 설립되었다. Ⅲ. 대구지역 근대춤 전승 인맥 대구 근대무용사의 대표적인 인물을 논하라 하면 주로 현대무용의 김상규, 주연희, 김기전, 정순영, 그리고 한국무용의 권명화 외 몇 분을 논하지만, 오늘날의 명맥 및 계승으로 살펴보았을 때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기점은 대구 출신의 정소산과 전남 나주 출신의 박지홍을 들 수 있겠다. 1. 정소산의 전승인맥: 김수희, 하규일→정소산→백년욱, 최묘정정소산은 대정권번 하규일의 문하생으로 1900년대의 근대무용사의 현장에서 신무용의 거센 바람 속에서 궁중무에 대한 소중한 가치와 전통의 맥을 전승·보존하며 대구 근대무용사 맥을 이어온 선구자이며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대구지역의 한국무용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기점을 마련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정소산에 대한 존재감까지도 잊혀진 채 21세기 현재에 이르렀다. 영남지역의 대구를 중심으로 근대무용사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소산의 무용활동에 대한 예술사적 평가는 대구 근대무용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며, 무용의 역사를 되짚어봄과 동시에 미래지향적 예술적 가치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며, 기록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춤 인생과 무용사적 가치는 대구지역 근대무용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중요한 가치 척도가 될 것이며, 대구지역의 근대무용사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아 소속의 관기들은 대구지역의 전통음악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도록 한 주역들이다. 조선시대 관기들의 구성이 일제에 의해 1909년 4월 경시청의 창기조합조직 명령건이 제정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교방의 관기들은 사회로 진출하여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렇게 대구의 관기 출신의 예기들이 주도적으로 1910년 5월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이라는 명칭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명무(名舞) 김수희 조합장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다만 김소희에 대한 이력사항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어 생년생몰 연대와 춤 경력에 대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대구기생조합이 개설되자 김수희 조합장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춤을 배우기 시작한 여섯 살(1910년) 난 어린 소녀가 정소산(본명은 정유색(鄭柳色), 호는 소산(小山), 1904-1978)이었다. 정소산은 1904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정사운과 상주 정진사댁의 막내딸로 어머니는 약방기생으로 유명했던 박남파 여사 사이의 1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정소산(유색)이도 어릴 적 몸이 약했는데, 기생이 되면 명이 길 운명이란 점장이의 말을 듣고 아버지 몰래 기생을 시키기 위해 춤을 배우게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구기생조합에서 김수희 조합장의 춤을 배운 후 정소산은 부산의 봉래권번<그림 2>, 수원의 화성재인청 등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7세(1921)에는 서울 대정권번에서 지냈다. 권번별 조합별로 조선의 예기들을 소개한 책 『조선미인보감』(1918)에는 원적과 현주소는 경성부 관철동으로 되어 있지만 경성에 머물던 주소인 것 같고, 원래 출생은 대구 중구 동성로 3가 12번지이다. 『조선미인보감』에 수록한 사진은 입적한지 1년 뒤인 18세 때 찍은 것이다.<그림 1> 원문에 보면 편모슬하의 무남독녀로 형편이 좋지 않아 권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쁜(좋은) 이마와 발을 가졌으며 청랑한 음성으로 시조잡가를 하는 특징이 소개되고 있으며 부드럽고 착한 성품으로 처음 보아도 구면에 본 것 같고 행동과 말투가 구수하다고 정소산의 인물과 성품이 나와 있는데, 이는 대구지방의 사투리 표현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정소산은 ‘다동조합’이 1918년 ‘대정권번’으로 바뀐(매일신보, 1918.1.27) 뒤 1921년 17세에 대정권번에 입적하여 당대의 명인으로 손꼽힌 인물 하규일(1867-1937)으로부터 1923년 19세에 본격적으로 궁중춤을 배웠는데, 김천흥이 전하는 하규일선생님이 가르친 궁중춤은 춘앵전, 무산향, 포구락, 장생보연지무, 무고, 선유락, 항장무, 가인전목단, 검무, 박접무와 재구성한 사고무, 성택무 등이었고, 여창가곡, 가사, 시조도 지도하였다. 하규일과 다수의 기생들이 1923년 대정권번을 탈퇴하여 그해 8월에 ‘경화권번’을 인수하여 설립한 ‘조선권번’으로 출범한 뒤에는 정소산이 직접 학감(1925년)이 되어 기녀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25년 23세 때에는 조선권번에 있던 대가 한성준(1874-1942)으로부터 승무를 배웠다. 그리고 1926년 이후 고향 대구로 돌아온 정소산은 1931년 3월 경북 예천에서 개최된 ‘예천대발전 신축낙성식 축하음악회’ 전단지로 대구조선정악단 일행이 출연한다는 팜플릿에서 확인된다. 달성권번 기생 신금홍을 비롯하여, 정류색(정소산)·황금주·이난향 등과 예천 기생들의 조연으로 소리와 춤을 공연하였던 것이다. 정소산은 가야금을 비롯한 춘앵무, 포구락 등 궁중정재와 살풀이춤, 승무, 장고, 법무 등을 탁월하게 추었다고 한다. 겨우 가정집 방 하나를 세내어 무용교습소라 차려놓고 가르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처음에는 궁중정재 위주로 가르쳤으나 인기도 없고 수입도 수월치 않아 살풀이춤, 승무, 장고 등도 혼합하여 지도하였다고 한다. 42세(1946)에 처음으로 발표회를 열었고, 46세(1948)에는 하서동에 ‘정소산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궁중춤 포구락, 무고, 검무 등의 전승과 보급에 힘썼다. 1969년 포구락, 검무, 무고의 궁중춤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지정 심사에 오르면서 그의 존재가 대구 지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나 심사에서는 탈락했다. 궁중춤 이외에 잘 알려진 정소산류 춤은 ‘수건춤(흥춤)과 ‘달구벌 검무’로 유명하며, 1978년 사망할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한국국악협회 3~5대 경북지부장, 경북 문화상(무용 부문, 1962), 문화공보부장관상, 대통령상 등을 수상했다.<정소산(鄭小山)(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제자로는 그의 며느리였던 최묘정(최복순)과 백년욱, 김기덕, 김해덕, 양영숙, 이윤도, 강명자 등과 타지역 박금술(서울), 이화진(산주), 문소야(익산) 등이 있는데 현재는 백년욱 만이 지역무용계를 지키면서 정소산 춤의 맥을 잇고 있다. 1955년 열 살이 되던 해 정소산의 문하에 들어간 백년욱은 정소산이 타계할 때까지 스승과 함께하면서 정소산의 춤 세계를 체득했으며 2015년 대구시 무형문화제 제18호로 ‘정소산류 수건춤’으로 지정받았다. 정소산의 작품으로는 궁중무용을 중심으로 한 궁중무, 보구락(현재 궁중무용 포구락을 말함.), 무고, 검무, 춘앵무 등이 있으며 민속무로는 소고춤, 장구춤, 바라춤, 농악, 부채춤 외 창작무용으로는 여인의 미, 화랑무, 즉흥무, 조국의 혼, 무영탑, 미선, 꽃보담 내가 예뻐, 낙랑공주, 여인의 예상, 자명고, 단오놀이, 계월향, 낙랑공주, 논개, 직녀성, 원시인의 기상, 흥취 등과 무용극인 구운몽, 논개, 신라의 노처녀 등이 있다. 그의 춤 특징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춤을 추었으며 허리를 굽힌다던지 꼬는 동작들은 없었다는 것은 유장하고 의례적인 궁중정재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강태홍의 전승인맥: 강태홍→조산월 등 35명1914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에 수록된 예인 100인은 주로 서울과 평양 중심으로 조사기록한 것이지만 몇 명 안되는 여타지방 출신 중에는 대구출신으로 조산월(趙山月)<13>, 옥화(玉花)<43>, 향심(香心)<61>, 설경패(薛瓊佩)<74> 등 4명에 대한 개인소개가 수록된 것만 보더라도 대구의 조합이나 권번출신들의 서울진출을 확인해주는 기사라고 볼 수 있다. 이어서 1918년 출간한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아오야나기 고타로(靑柳綱太郞), 지송욱(池松旭) 편저)에는 조선 예기 611명의 화보집인데, 대구조합(大邱組合) 소속 32명(28명 대구출신, 4명은 타지방출신), 김천조합 3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1914년 매일신보에 기록된 조산월(趙山月)은 중복기록 되어 있어 옥화(玉花), 향심(香心), 설경패(薛瓊佩) 3명을 포함하면 35명의 인물들이 대구출신으로 춤과 가야금병창을 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권번의 춤공연 종목은 고무(鼓舞), 승무, 각항(各項)정재무, 검무, 남무 등이었다고 하였다. 당시 가야금과 가야금병창과 춤을 가르친 명인은 전남 무안 출신의 강태홍(姜太弘,1893-1957)으로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기생)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었다. 이때 1918년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대구조합의 예기 32명중 춤 기예가 기록된 기생은 22명이다. 즉 염옥련(廉玉蓮: 23세, 정재무·남무), 이계화(李桂花: 22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와 김옥산(金玉山, 20세, 검무·남무·각항정재무), 도란옥(都蘭玉: 21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상남수(尙南秀: 16세, 검무·승무·남무·각항정재무), 안사운(安斯雲: 20세, 검무·승무·각항정재무, 이점홍(李点紅: 18세, 각항정재무), 권복경(權福璟: 21세, 정재무), 도송옥(都松玉: 18세,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승무), 노소옥(盧小玉: 17세, 승무·정재무), 이도희(李桃姬: 16세, 승무·정재무, 윤월향(尹月香: 18세, 검무·고무(鼓舞)), 백금옥(白錦玉: 14세, 검무·승무), 전무선(全舞仙: 18세, 승무), 강매월(姜梅月: 19세, 검무), 최경란(崔瓊蘭: 15세, 선승무(善僧舞)), 그리고 서운향(徐雲香: 14세), 이계란(李桂蘭: 14세), 백초월(白楚月: 14세), 김산옥(金山玉: 16세), 민봉진(閔鳳珍: 16세), 허경희(許瓊姬: 15세)는 승무 한 종목과 국악종목이 기록되어 있다. 종목별로는 승무가 15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서 정재무 11명, 검무 8명, 남무 5명, 고무 1명 등으로 나타났으며, 정재무는 종목이 다양(50여종)하기 때문에 ‘각항정재무(各項呈才舞)’는 많은 정재무를 출 수 있는 능력자를 뜻하며, ‘정재무약간(呈才舞若干)’은 약간의 정재무를 출 수 있다는 뜻이다. 윤월향의 기록에만 고무를 공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무는 정재종목 중 하나로 윤월향(尹月香)이 여러 정재 중 고무(鼓舞)를 잘 추어서 기예기록에 기록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승무, 병창, 현금(玄琴), 산조, 양금, 가야금 등의 앞에 ‘선(善)’을 붙여 ‘선승무(善僧舞)’ 등으로 표기한 것은 남보다 ‘앞선다’는 뜻으로 우수한 능력자임을 표기한 것이며 ‘특(特)’ 또는 ‘특상(特上)’은 ‘특히 더 잘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또한 산조(酸調)의 한자표기가 오늘날 ‘산조(散調)’ 표기와 다름도 알 수 있다. 그밖에 김매월(金梅月)·박취옥(朴翠玉)·송홍련(宋紅蓮)·안선옥(安鮮玉)·우달경(禹達卿)·우연화(禹蓮花)·이미화(李美花)·조산월(趙山月)·최금란(崔錦蘭)·허금선(許錦仙) 등 10명은 춤 종목 없는 국악종목으로 가야금, 병창, 산조, 가곡, 현금, 양금, 잡가 등과 정자(正字), 초서(草書) 등의 서예도 기록하였다. 이상과 같이 1914년 대구출신 서울에서 활동한 이는 「예단일백인(藝檀一百人)」에 4명과 1918년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의 대구조합의 32 등 35명의 기녀들의 신상명세와 기예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을 가르친 스승 강태홍(姜太弘,1893~1957)은 1911년(19세)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조합에서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후 잠시 경주권번으로 갔다가 대구조합이 대구권번(大邱券番)으로 바뀐 후에 다시 돌아와 가르치다가 울산권번(蔚山券番)을 거쳐 1939년(47세) 동래권번(東萊券番)으로 떠났다. 당시 권번조직에서 교육을 담당한 지도자는 전국적으로 남자 재인(才人)과 창우(娼優)들이 춤과 소리와 악기사범을 맡아 지도했었다. 간혹 재능이 뛰어나나 나이가 많아 물러난 퇴기(退妓)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관리자 역할을 하였다. 재인들이 지도사범으로 나서게 된 배경은 우선 어려서는 무동(舞童)으로 춤과 소리를 배워 추지만 성장하면서부터는 악사역할로 전환하여 악기연주와 수많은 춤과 소리반주를 하면서 장단변화와 춤동작 전개를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도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게 지도력이 유명해진 재인들은 큰 고을로 모셔가는 것이 많아져 강태홍도 여러 곳의 권번을 거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부산동래에 정착하여 가르친 가야금산조(강태홍류)는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8호(1989, 보유자 신명숙)로 지정되어 전승하고 있으며, 그 때 부산에서 강태홍의 춤을 배운 제자로는 한순서(강태홍류 춤보존회)와 김온경(부산무형문화재 제10호 동래고무 보유자, 1993) 등이 있다. 한순서(1941-)의 증언에 따르면 강태홍은 키가 작으나 흰머리에 변화무쌍하고 재주가 많으며 호쾌하고 멋있게 춤과 연기를 하였다 한다. 그래서 가야금도 다양한 기교로 배웠으며, 춤 역시도 다양하고 활기 넘치고 호쾌하게 춤을 추도록 배웠다. 특히 승무의 북가락은 지금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한순서로 전승된 승무는 재인계통 승무의 특색인 승복을 벗고 떠나는 결말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살풀이춤은 여인의 한과 감정을 담아서 추는 등 "어떤 춤이 됐던 태마가 있게 추어라”라고 하였으며, "극적인 감정을 살려 추어야지 밋밋하게 추는 것은 멋없는 춤이 된다”라고 지도 하였다고 한다. 그밖에도 춤집이 크고 호쾌한 영남 덧배기가락이 물씬 밴 소고입춤, 장고춤, 바라춤, 화관무, 초립동, 봄타령, 도라지, 꼭두각시 등을 전수받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00년대 초기 대구지역춤을 전승하며 이끌었던 무용인물로는 강태홍을 대표로 꼽을 수 있고 그의 지도를 받은 대구조합과 대구권번의 35명의 기녀들에 대한 자료의 편린(片鱗)이나마 반가운 일이며 아직은 증언자 있어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강태홍은 대구를 일직 떠나 전승력을 잃었는지 대구 전승자가 어딘가에 있는지는 조사연구할 시간이 부족하여 알 수 없다. 혹시나 대구에서 근거자료가 나와 주기를 바랄 뿐이다. 3. 박지홍의 전승인맥: 박지홍→ 최희선(달성권번), 권명화(대동권번)근대의 여명기인 1911년에 대구조합과 뒤를 이은 대구권번의 악가무 지도사범으로 초빙되어 지도하던 강태홍이 떠나고 뒤를 이어 1920년대 후반 지도자로 초빙된 이는 전남 나주 출신으로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 박지홍(朴枝洪, 1884,1889?-1958,1959?)이었다. 박지홍은 서편제의 대가 김창환(1854-1939)의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고 사촌형님뻘인 박기홍에게 소리 더늠을 이어받으며 수행고수를 하다가 대구로 이주하였다. 건장한 체격에 미남으로 「심청가」와 「흥보가」를 잘하였다. 박귀희(朴貴姬)가 그에게서 판소리와 단가(短歌)를 배웠고, 박초향(朴初香)이 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박동진(朴東鎭,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이 「흥보가」를 배웠다. 일제강점기 대구에는 대구기생조합(대구권번), 달성권번과 대동권번 세 곳이 있었다. 1927년 문을 연 달성권번은 대구시 중구 상서동에 소재해 있었고, 해방 후 대동권번은 1940년 전후로 설립되어 대구역 교동시장 근처에 있었다. 이때 달성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친 사람은 박지홍 외에 채승호(채찬복의 형)가 있었다. 달성권번에서는 춤, 시조, 가곡, 창 등을 공통적으로 익히도록 하였다. 박지홍이 창, 기악, 춤을 지도하였고, 박녹주가 판소리와 춤을 지도했다. 특히 춤에 특출한 기생들은 따로 입춤, 검무, 살풀이춤, 승무 등을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대동권번 역시 기본 춤, 시조, 창 등을 공통과목으로 하고 춤으로는 입춤, 살풀이춤, 검무, 승무, 소고춤 등을 가르쳤다. 한편 해방 이후 나주에서 온 살풀이의 대가 박지홍(朴枝洪)에 의해 중구 교동(교동상가백화점 자리)에서 사설 대동권번(이후 남산동에 경북국악원 개설)이 생겨 대구지역에 전통음악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아울러 달성공원 주위와 서문시장 등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사설 기생교육단체가 여러 곳 생겨 대구지역 전통음악을 유지하게 되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대구지역 전통음악예술의 원천은 일제강점기 대구기생조합을 비롯한 대구권번과 달성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대구의 대동권번에서 ‘기생들의 시험’을 실시하여 뽑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광복 후 두 번째의 기생시험을 1948년 9월에 실시하여 응모자 84명 중 60여 명이 합격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이 가무를 하려는 기생이 되려면 이 권번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들이 3년간 수업을 받으면 요정을 출입할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다. 수업과목은 춤·시조·풍류·가야금병창 등이었다. 소리·춤·기악 등 악가무를 동시에 지닌 박기홍에서 박지홍으로 이어지는 달성권번, 대동권번의 춤이 대구지역 권번춤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음은 의미로운 사실이다. 이러한 박지홍 권번 교육은 최희선, 권명화에게 계승되어 현재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전통 춤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최희선은 1929년 대구출생(2010.10.12. 작고)으로 10세 후반 명인 박지홍에게 전통춤을 배우며 무용계에 입문하여, 상경하여 1945년 장추화 무용연구소에서 춤을 배우고,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하고, 1950년 6.25 전쟁 이후 대구에 내려가 박지홍의 춤을 배우고 청구대학에서 공부하며 무용 활동을 하였다. 예그린악단 무용부장이었던 그녀는 1957년 제 1회 최희선 무용발표회를 시작으로 1958년 청구대학 강당에서, 1959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승무』, 『부채춤』, 『화랑무』, 『장고춤』 등의 한국무용을 선보였다. 권명화는 1934년 경북 김천출생으로 6.25전쟁 중 피난간 대구에서 절집의 풍악소리에 사로잡혀 영남 최고의 풍류객 박지홍을 만나 1950년부터 사사 받고, 그에게서 배운지 6개월 만에 대구극장에서 열린 무용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1955년 박지홍 고전무용학원 강사가 되었다. 일제의 관할에 있었던 만큼 크게 번성하였던 달성권번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동권번은 해방 후에도 얼마간 존속되어 오다가 1950년 화재로 인해 없어졌다고 전한다. 박지홍이 운영하는 대동권번은 그해 남산동 포구당(포교당) 폐기된 절을 기녀와 회원들이 모은 돈으로 임대하여 ‘경북국악원’이라는 이름으로 권번의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이때 김천에서 6·25한국동란으로 피난해온 권명화 가족이 피난하여 세든 집이 박지홍의 경북국악원 이웃집이어서 담너머로 연습하는 악가무를 보고 따라 흉내 내다가 용기를 내어 직접 찾아가 입회를 하여 전수를 받았다. 권명화가 전승하고 있는 춤은 승무, 살풀이춤(대구시무형문화재 제9호), 입춤, 소고춤, 검무 등과 경산자인단오제(국가무형문화재 제44호)의 여원무를 비롯하여 단오굿 일곱거리의 부정굿춤, 산신축원굿춤, 천왕굿춤, 칠성굿춤, 대감굿춤, 장군굿춤, 대신굿춤, 해원굿춤이 있고, 축원춤으로 산거리춤(방울과 부채), 지전춤, 선비춤(한량무), 바라춤, 선녀춤, 오방신장춤, 장군칼춤 등이 있으며 건들바위 치성굿’도 복원하여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1년, 여수)에 출품한 적도 있다. 일제강점기 대구지역의 무대 예능화 된 전통춤은 박지홍을 정점으로 한 달성권번, 대동권번 등 두 개의 권번을 통해 전승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말 궁중 여령춤을 계승하고 있는 정소산(1898-1975)으로 그 맥이 이어져왔다. 따라서 권번이나 기생을 제외하고는 대구지역 전통춤의 역사적 맥락을 말하기란 어렵다. 박지홍은 대구에서 계속 연구소를 운영하였는데, 1958년 제1회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경북 대표로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제1회 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한 작품은 쾌지나칭칭나네, 하회별신굿, 경산옹헤야, 함창모내기놀이, 안동놋다리였다. 당시의 출연진은 신장대에 박지홍, 먹중과 분네에 최희선, 초랭이에 김경자, 양반에 채승호, 선비에 채찬복 등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그 당시의 제일 극장에서 앵콜 공연을 준비하다가 장구채를 잡은 채로 과로로 쓰러져 며칠간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매다 마침내 운명하였다. 이 시기의 대구의 전통춤은 기방춤으로 일컬어지는 박지홍류와 궁중무인 정소산류로 크게 대별됨을 알 수 있다.4. 김상규의 전승인맥: 김상규→최영자, 이숙재, 주연희, 서진은 등 대구에서 현대무용이 시작된 시기는 1930년대로 볼 수 있다. 일본의 현대무용 개척자인 이시이바쿠(石井幕)는 우리나라에서도 현대무용의 씨앗을 뿌린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시이 뒤를 이어서 최승희, 조택원, 조용자, 김상규, 김한일, 장추화, 박용호 등 많은 한국의 무용가들이 활약하였다. 대구에서의 현대무용 공연은 1935년 최승희가 대구 공회당에서 한 것이 효시였고, 1936년에 조택원이 같은 장소에서 도불(渡佛)고별공연을 한 것이 그 다음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한 공연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던 이시이가 귀국도중 대구에 들러 1944년 7월 하순에 대구 공회당에서 공연을 하였다. 같은 해 최승희와 조택원도 대구공회당에서 무용공연을 가졌으며, 8.15광복 직전에 이시이의 문하생 조용자도 대구 공회당에서 발표를 가진 바 있다. 그는 1947년 현재의 대봉동 전신전화국 자리에 대구 최초로 무용연구소를 차려 활동하였다. 해방 된 이듬해인 1946년에는 발레를 전공한 한동인과 정지수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했고, 그 해 가을 장추화, 이석예도 발표회를 가졌다. 1947년에는 이시이 문하생인 박용호와 조용자의 무용공연이 만경관과 키네마에서 있었다. 또한 경북여고를 졸업한 뒤에 신성무용소를 열어 후학을 지도 한 김선화가 키네마에서 공연을 하였으며, 대구여중 무용교사였던 하복조와 경북여고 무용교사였던 주연희가 찬조출연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지금의 대구 현대무용을 존속케 하는 역사적 효시에는 김상규(金湘圭, 예명 技波, 1922-1989)가 있었다. 김상규는 1922년 5월 25일, 경북 군위군 군위면 금구동 134번지에서 안동 김씨 집안의 부농한 아버지 김병호(金怲鎬)와 어머니 정직영(鄭稷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상규는 누나인 김무숙이 태어나고 5년 만에 낳은 자식이어서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어릴 때부터 춤추는 것을 좋아했으며 한 번은 엿장수가 "엿 사시오?”하며 가위를 "쨍강쨍강” 치자 동생(상규)이 "거기에 맞춰 춤추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누나 김무숙이 말하였다. 또 마을에 남사당패 거리나 서커스단의 공연이 오면 하루도 빠짐없이 구경하며, 이들이 떠날 때면 동네 어귀 멀리까지 따라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성대다가 울면서 돌아오곤 했다고 한다. 그 당시 김상규의 마음속 우상은 연희패들이었고 자신도 언젠가는 이들과 같은 연희패가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대구로 유학하여 수창초등학교를 다닐 당시 1931년 9월16일 대구극장에서 공연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면서부터 무용에 열정을 불태우기 위해 법학공부해서 판검사 돼서 오겠다고 핑계를 대고 14세(1935)에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와세다중학교를 다니면서 저녁에 이시이바쿠 연구소에 가서 신무용을 배웠으며, 동경전기학교(현 대학승격)를 졸업한 뒤 1941년 와세다대학 문학부와 1943년 동경음악과를 수학해 다방면의 관심을 보여주었고, 1946년 10년의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예능분야에 뛰어난 김상규는 영화, 연극, 음악, 회화부문까지 다방면에 재능이 있어 골고루 습득하였다. 농촌의 자연미와 순박성, 넉넉함의 감수성은 무용가로 활동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여성들도 사회적 인식을 깨기 힘든 시절에 남성무용수로 향토 대구의 현대무용을 개척하고 뿌리 내리게 한 선구자로 평가할 수 있다. 김상규는 조택원, 최승희, 이시이 등의 공연을 보고 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해 판검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문하에서 다년간 수련을 하고, 대구로 돌아와 신무용 보급을 한 인물이었다. 1945년 8.15광복이후 정치적 혼란기를 거친 다음 대구무용계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김상규는 1946년 귀국 후 바로 신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1949년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하고 만경관에서 가진 그의 ‘김상규 신무용 발표회’라는 타이틀의 첫 발표회에는 최희선, 최미연, 박근숙 등 20여 명이 출연하였으며, 이는 대구지역에서 자생한 신무용의 첫 보급이라 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문총구국대가 결성되어 김상규가 무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 무렵 문하생으로는 김화심, 최영자, 문명희, 이빈화, 박득남, 김경자, 주연희, 박득순, 장성자, 박근숙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문총구국대 경북지대는 해체되고 1951년 12월 19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발족되었으며, 무용위원장은 김상규가 맡았다. 1951년부터 김상규 무용발표회가 국립극장(키네마극장, 현 한일극장, 전쟁 중에 중앙국립극장이 대구로 옮겨짐)에서 자주 열렸고, 이때의 출연자들로는 이월영, 최미연, 이빈화, 최영자, 한순옥, 장일, 문영희, 백운향, 박득남, 박득순 등이 있었고, 김경자, 이숙재, 백년욱 등이 어린나이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상규는 전쟁이라는 혼란과 모든 공연운영비를 자신이 부담해야 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1952년 4월 14일에서 15일(오후 1시, 7시)까지 대구문화극장에서 제2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가졌으며, 휴전될 무렵인 1953년 6월 4일에서 6일(오후 1시,3시 30분,7시)까지는 전쟁 때문에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현 한일극장)에서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를 했다. 뚜렷한 연습장 하나 없이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또는 옥상 등을 이용하여 연습하였으며 미제 내의를 검정으로 물들여 연습복으로 입고, 제대로 된 무용화 없이 맨발로 시멘트 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연습하였다. 그리고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연습과정을 거친 후 공연을 하기 위해서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 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중이 몰려 들었음에도 그 경비를 충당하기 어려워 무용가와 무용가를 둔 집안은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김상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작품 발표회를 해마다 열다 보니 논밭을 팔게 되고 결국은 집까지 팔게 되어 셋방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활형편은 어려워도 대구에서 인정받는 향토계의 춤꾼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대구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남성무용수로 작품세계는 끝없이 폭을 넓혔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춤을 사랑하고 향토계에 예술세계의 밑거름이 되도록 터전을 닦았다. 1956년 이후의 대구무용계는 여전히 김상규의 독무대였다. 김상규는 1951년 제1회 김상규 무용발표회를 가진 이후 1955년 제5회, 1957년 제 6회 무용발표회를 가졌다. 김상규 문하생이었던 김상아, 구숙자, 주연희, 장성자, 서차애 등이 키네마에서 열린 제 6회 김상규 무용발표회에 출연하였다. 개인발표회가 없었던 1956년에도 경북예술제에 찬조출연하여 『아뜨리에의 환상』, 『성당의 아침』등 화려한 무용의 향연을 베풀었다. 김상규는 무용인으로는 처음으로 1957년도 경상북도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혈육으로는 대구 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 김소라가 있으며, 1989년 작고할 때까지 100여편의 작품을 안무하였다. 손꼽히는 제자로는 최영자, 백운향, 박덕남, 박덕순, 백년욱, 이숙재, 김상아, 주연희, 서진은, 장성자, 오애리, 정선자, 김예숙, 이명주, 박성실, 김미연 등이 있다. 김상규의 작품세계는 첫째,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켜 만든 작품으로는 「동심」,「처녀총각」,「애기와 어른」,「형제」,「명상」,「봄노리」,「젊은 날의 추억」,「봄처녀」,「파동」,「새싹」,「무영탑」,「파랑새」,「악몽」,「마음의 생태」,「망상」,「환희」,「월야」,「춘일서정」,「휴식의 환각」,「길손」,「목선」,「소녀시절」,「사의 유혹」,「화염」,「희망의 언덕」,「들국화 피는 시절」,「나그네」,「잃어버린 마음」,「가면무」,「고혼」,「애상곡」,「사슬을 끊고」,「가을의 회상시곡」,「의용」,「가로등」,「건망증」,「완행열차」,「기억을 기다리는 거울」,「은방울」,「초원의 동심」,「지평선」,「개구리의 합창」,「산소결핍」,「고목의 노래」,「수련」,「원색의 회량」,「가면의 생태」,「장미의 꿈」,「푸른 언덕」,「타임」,「작품B」 등이 있고, 둘째, 우리 전통적인 문화와 겨레의 민족성을 다룬 작품으로는 「활양」,「아리랑 삼조」,「황진이」,「향토의 인상」,「태공망」,「살풀이舞」,「건설」,「전설의 환상」,「마음의 생태」,「힘」,「호걸무인」,「검무」,「희생」,「기원」,「유상무상」,「순국의 처녀」,「백홍」,「타령조」,「산소결핍」,「이 흙이 있는 한 절망은 없다」,「수련」,「민족의 흥」,「전진」,「회귀」,「산하」등이 있으며, 셋째, 삶 자체를 불교에 의지해 온 평소의 모습과 심오한 종교관과 사상을 다룬 작품으로는,「창조의 신」,「정불국토」,「무영탑」,「기원」,「유상무상」,「탈속」,「남방의 서정」,「성당의 아침」,「재생」,「아잔타의 꿈」,「관음보살」,「보리수」,「생명의 향연」,「휘데아스의 꿈」,「니르바나」,「원색의 회량」,「간다라의 벽화」,「정각」등 1949년부터 1976년까지 13회에 걸쳐 100여 편을 발표하였다. 그가 30년 이상을 향토 무용계에 독보적으로 활동하다 보니 주변의 시선에 어려운 점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무용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은 시절부터 여성도 아닌 남성이 무용계에 뛰어들어 지역무용계에 토양을 이루어 낸 공은 인정받아야 할 일임에 분명하다. 5. 정막(정순영)과 김기전의 전승인맥 김상규와 별도로 대구 현대무용의 역사에 빠져서는 안 될 인물로는 정막(鄭漠, 본명 鄭淳永, 1928-2012)과 김기전(金起田, 1935-) 부부를 들 수 있다. 이들은 1950년 무용교육에 뜻을 두고 원화여고에서 정막 무용연구소로 출발했다고 언급한다. 정막은 1947년 겨울, 서울 명동의 문교부 인가 함귀봉이 설립한 조선 교육 무용연구소에 첫 발을 디딘 것이 무용예술의 입문이었고, 6.25사변을 통해 무용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현학선이 1953년 부산극장 종군극작가단 신작무대에 <인어의 정설>로 출연하고, 그해 8·15경축무용제에 중앙국립극장(전쟁으로 대구이전)에서 송범, 김진걸, 이인범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54년에 중앙국립극장(대구)에서 정막의 안무로 제1회 개인발표회를 가졌다. 김기전은 1935년 동경에서 태어나 1940년 여섯살 때 고향인 함경남도로 돌아갔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경남여고와 부산대에서 공부하고 경기여대를 수료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용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발표회 무대에 자주 섰다. 피난시절 이인범발레연구소에서 공부하고 1952년 임천수 국보오페라단에 1954년까지 단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7월 육군 군예대(KAS)에서 무용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중․고등학교 강당이나 창고, 업무가 끝난 사무실 등을 이용하여 연습을 했고, 미제 내의를 검정색으로 물들여 입고 다시 변형시켜 한번 더 입고, 3번은 활용했다.”며 당시의 열악했던 연습과정을 피력하고 있다. 1958년 12월에는 경북무용협회가 결성되어 키네마에서 창립공연을 하였는데, 정소산, 정막, 최희선, 현학선, 박금슬, 문소조 등이 출연하였다. 이 단체는 경북문화단체 총 연합회로 흡수되었다. 현학선도 이때 처녀무용발표회를 가져 향토무용계를 고무시켰다. 1961년 대구바레아카데미를 창설하고 부인 김기전과 대구지역에서 현대춤과 발레를 교습하여 춤인재를 양성하였다. 김기전은 국내 최초로 대구시립현대무용단을 설립하여 초대(1981~1988년) 안무자로 대구 현대무용계를 직업무용단으로 이끌어왔다. 정막은 춤 실연자이자 춤 연출자, 안무가로서, 그리고 춤 교육자, 이론가, 평론가로서 대구, 경북지역 춤문화의 구심체였다. 2000년에 이르러 (사)대구시민문화연구소를 차려 대구지역 춤문화를 비롯하여 시민문화 향상에 매진해온 일은 중앙중심의 무용편중에 대한 대항마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에는 무용공연에 관계되는 모든 운영비(의상비, 무용수들과 악사들의 숙식비, 조명비등)를 개인이 책임졌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으나 그 경비를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따라서 재정적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춤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무용가들이 세인의 눈총을 받으며 춤을 춘 배고픔 속에서도 민족혼을 고취시키고 춤 예술의 지평을 여는 창작 무용들을 계속 발표하였기 때문에 예술가로서 인정받는 좋은 환경의 무용세계를 후배 무용가들에게 물려주게 된 계기가 마련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Ⅳ. 결언- 근대전기 대구지역춤의 인맥적 특징과 의의 근대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60년 이전 대구지역춤의 전승인맥을 고찰하면서 살펴본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정소산, 강태홍, 박지홍, 김상규 등 춤 명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구지역춤을 발전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여‘춤의 고장을 수립’하였다. 대구인들의 뛰어난 적응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은 근대 혼돈의 역사 속에서도 대구의 전통적 춤기반을 이어받아 전승하였고 새로운 현대춤도 정착시켜나갔다. 2) 각자 독자적인 춤정신과 다양한 춤방식으로 대구춤을 범한국적이고 세계적인‘안무도시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대구지역 전통춤의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역춤의 유입전승, 궁중춤을 민속춤으로 이동한 계층전승, 외래전승, 창조전승 등의 각자 다양한 전승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구지역 전통춤(교방 및 기방춤, 민간춤, 종교의식춤)을 꾸준히 계승한 자체전승을 비롯하여, 타지방무용인(박지홍, 강태홍)들을 초청하여 대구 전통춤으로 정착시킨 유입전승, 수준높은 궁중춤을 대구민속춤으로 정착(정소산)시킨 계층전승, 국제무대로 진출하여 현대춤을 세계적인 현대춤 도시(김상규)로 도약시킨 외래전승, 근현대 무용가들의 창작정신으로 대구현대춤(김상규, 정막, 김기전)을 발전시킨 창조정신 등으로 대구춤계를 주도하였으며 후대에 대구출신 무용가들이 경향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3) 대구감영과 대구부 예기(藝妓)들의 뿌리깊은 교방춤과 전통춤 등‘역사춤의 혈통 계승’으로 근대춤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이바지하였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1736)(1768),『경상도읍지』(1832년경),『영남읍지』(1871년경, 1895년)에 보이는 대구예기들의 교방춤과 1908년경에 미국 빅타음반에 취입까지 이어진 예기들의 후예의 피가 흐르고 있다. 4) 6·25동란으로 북한지방과 수도권 피난민이 대구로 집결하였고 임시 중앙국립극장 설립으로 ‘춤공연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급 명무공연과 춤인적 교류가 활발하였다. 5) 대구지역춤에는 영남춤의 보편적 특징, 영남북부춤의 중심적 특징, 대구의 향토춤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영남춤의 요람(메카)’으로 발돋음하였다. 민간전승의 민속춤은 오랜 역사속에 뿌리내리며 정착된 전통문화이기에 생태적으로 영남권춤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불어 영남북부권의 거점도시로 영남남부와 다른 영남북부권춤의 특성도 지니고, 대구만의 향토춤도 여전히 전승되어 왔다.결국 대구는 근원적으로 한국전통춤 중에서 광역적인 영남춤의 성향을 지니면서 대구만의 지역민속춤의 특색을 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일제강점과 서구문화의 홍수와 6·25 한국동란으로 인한 대구집중화 현상 등 급변하는 역사와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대구지역춤은 지역화, 탈지역화, 범한국화, 중심화, 국제화 등으로 중앙무대와의 교류가 활달하게 전개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20세기 근대전기의 대구춤의 문화사적 가치나 의의를 발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도 있다. 물론 한국근대사의 범국가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1960년 이전의 한국사회는 근대춤의 ‘여명기’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혼란기’이며 ‘전란기’이기에 서세동점(西勢東漸)으로 전통문화의 ‘쇠퇴기’이며 외래문화의 ‘범람기’의 시련을 겪었다. 따라서 대구춤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운명으로 현란했던 관아의 교방춤과 권번춤은 역사의 뒤안길(박지홍, 정소산)로 접어들어 몇몇 춤꾼(최희선, 권명화, 백년욱 등)과 몇 가지 춤만이 명맥을 잇고 있는 실정이었다. 시대조류에 따라 한국춤은 전통춤과 창작춤을 동시에 표현하는 어려움에서도 꿋꿋이 맥(백년욱, 주연희 등)을 이어 왔다. 현대춤과 발레는 대구(김상규, 최원경, 김기전, 구본숙)는 물론 서울 등지로 진출(이숙재, 김복희, 박인숙, 백현순, 이화석, 김용철, 손윤숙)하여‘춤의 고장’의 토양에서 성장하여 대구출신다운 유명 무용가들도 많은 점 또한 이를 반증하는 것들이다. 이제 많은 중견무용가들(박연진, 임혜자, 이정일, 김현옥, 장유경, 김희숙, 박현옥, 김소라, 강정선, 김죽엽, 최두혁, 오레지나, 채명)과 수많은 신진무용가들(김순주, 김나영, 김명란, 김현태, 김희경, 노진환, 박미향, 박정희, 박종수, 변인숙, 안지혜, 우혜영, 유연아, 이경화, 이수연, 이승대, 장 오, 장현희, 장혜린, 전효진, 조은희, 최석민, 최윤영, 추현주, 편봉하)등이 대를 이어 대구춤의 정신과 전성기를 향해 매진하고 있어 밝은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고 본다.(대구세계안무페스티벌 세미나에서 발제된 원고) ) 참고문헌 계명대 한국학연구소(2011). 영남의 지역예술연구.金宅圭·朴大鉉 編譯(1997). 大丘邑誌, 대구광역시.김영희(2006). 개화기대중예술의 꽃, 기생, 민속원.김죽엽(2010). 정소산의 작품활동을 통한 무용사적 고찰: 대구활동을 중심으로, 영남 악가무 재조명, 서울:한국국악학회.김죽엽(2011),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정재가 대구무용사에 끼친 영향, 음악문헌학, Vol.- No.2, 한국음악문헌학회.김죽엽(2013). 대구 근대무용사의 선구자 정소산의 존재적 가치인식론, 한국무용학회 13권 2호.김채현·김영희·이종숙·김채원·조경아(2015,). 한국춤통사, 보고사.김천흥(2005). 우리춤이야기, 민속원.노동은(1995). 한국근대음악사1, 한길사.대구시사편찬위원회(1995). 대구시사. 대구시.대구예총(2012). 대구예총50년사. 대구: 동연합회.박민우(2013), 김상규 생애를 통한 무용사적 고찰,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박성실(1997), 韓國近代舞踊史에 나타난 金湘圭의 춤 硏究 : 敎育者的 成長科程을 中心으로, 中央大學校 大學院.박연진·장유경(1993). 대구 한국무용 30년사, 한국무용연구 11집, 한국무용연구회.박연진·장유경(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박황(1974). 판소리소사. 신구문화사.배연형(2011). 한국유성기음반 : 1907-1945, 권5. 한걸음 더.손태룡(2001). 每日申報音樂記事總索引:1910.5.30.-1945.8.15. 民俗苑.손태룡(2005). 달성권번의 음악사학적 조명, 향토문화 제20 특집호, 대구향토문화연구소.손태룡(2012). 대구지역의 기생단체 연구, 한국학논집 46,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송기영(2011). 정소산의 예술 활동이 대구 근대 무용사에 끼친 영향, 모드니 예술 5집, 한국문화예술교육학회.송방송(2003). 京城放送局에 출연한 藝妓의 공연활동, 한국근대음악사연구, 민속원.송방송(2007). 증보한국음악통사, 서울: 민속원.宋芳松(2012). 한겨레음악인대사전, 서울: 보고사.송방송·이진원(2007). 조선미인보감(朝鮮美人寶鑑), 민속원.안제승(1984). 한국신무용사, 승리문화사.윤미라(2000). 대구 달구벌 입춤의 전승과 변형에 관한 연구, 대한무용학회 제28호.윤현숙(2007). 대구지역 무용의 흐름에 관한 연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이규리(2004). 朝鮮後期 外方官妓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병옥(2011). 영남춤의 생태민속학적 고찰, 한국무용연구, 29권 2호, 한국무용연구학회,이병옥(2013). 한국 전통춤의 분류와 양식적 특징: 정병호의 분류법 검토를 중심으로, 공연문화연구 27권.이숙영(1995). 지역문화 예술로서 현대무용의 활성화 방안 : 광주,대구,부산 지역 공연관람자를 중심으로.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이숙재(1999). 技波 金湘圭 삶과 예술, 그리고 작품세계의 재조명, 한국 근대춤 인물사(1), 송수남 엮음, 현대미학사.이은주(2007). 춤 33인, 푸른미디어.정순영(2013). 대구춤 60년사, 사단법인 다다.주연희·구본숙(1993). 대구예술 삼십년사. 대구: 대구예총.채명·박정희(2010). 춤신을 만나다 권명화, 대구동구팔공문화원.채희완(2013). 춤창작과 비평에 예술공학 시스템을 도입함, 대구춤 60년사, 정순영 저, 사단법인 다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1998). 한국유성기음반총목록. 민속원.錄音文獻學會(昭和11). レコド文化發達史.<광무대(光武臺)>(한겨레음악대사전, 2012.11.2. 도서출판 보고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948646&cid=42607&categoryId=42607.<한국근대의 음악원형>(http://music.culturecontent.com) 참조.<다동기생조합(茶洞妓生組合)>(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대정권번(大正券番)>(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지방의 권번>(기생 이야기-일제시대의 대중스타, 2007. 7. 5, ㈜살림출판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87073&cid=42967&categoryId=42967.<조선 기생>, 연예인이 되다 – 역사채널e 2016.06.14. http://blog.naver.com/eunayoon715/220725445504.『매일신문』. 1958.8.10.『동아일보』. 1958.8.13.『매일신문』. 1958.8.9., 9.1.『매일신보』. 1972.11. 16.『매일신보』. 1914.1.28.-6.11.『대구시보』. 1948.9.23.월간 대구문화. 2007.4월호.이생강 면담, 2013, 면담자: 김죽엽.한순서 전화면담, 2016.7.13. 면담자 : 이병옥.한순서 면담, 2010~2013, 장소: 강태홍춤연구소, 면담자: 이병옥.권명화 전화면담, 2016.7.16.~18(3회), 면담자: 이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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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 ‘현대음악으로 그린 이중섭의 사랑, 그리움 그리고 희망’현대창작음악단체 뮤직 노마드가 주최하고 현대문화기획, 앙상블 루미나시아, 그루밍엔터테인먼트가 공동 주관하는 2023년 제16회 뮤직노마드 현대창작음악 연주회 ‘현대음악으로 그린 이중섭의 사랑, 그리움 그리고 희망’이 9월 26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공연된다. 뮤직노마드(MusicNomad, the Society of Contemporary Music in Gwangju)는 2009년 광주 호남권에서 현대 음악을 창작하고 가르치는 작곡가들의 일련의 활동을 지칭하면서 발족한 작곡 동인단체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동시대 음악의 작곡과 연주를 통해 광주 호남권의 클래식 음악 발전과 우리나라 창작 음악 활성화에 이바지하며 나아가 한국 창작 음악의 세계화를 목적으로, 현대 음악계에 활력소가 될 다양한 형태의 공연 및 교육 행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이뤄지는 제16회 뮤직노마드 정기연주회는 화가 이중섭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일제 치하와 6.25전쟁의 격동기를 지낸 화가 이중섭은 세태에의 절망, 빈곤의 고난과 가족에의 절절한 순애보를 그림에 담아 희망의 메시지로 승화시켰다. 이중섭이 말한 ‘예술-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겨낸 기록’은 얼마 전까지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와 심각해지는 기후 위기, 세계 어딘가에선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해체되는 우리 시대에도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는 예술을 꿈꾸라고 외치고 있다. 이번 연주회에서는 일곱 개의 무대 영상으로 재탄생한 이중섭 작품들의 윤곽에 선율을 입히고 굵게 채색된 투박한 형상에 화성을 얹어낼 예정이다.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는 작곡가 임재경(숙명여대 교수), 박은경(서울대 등 강사), 이은주(전남대 강사)와 중견 작곡가 정현수(전남대 교수), 오세일(인제대 교수), 신나라(경희대 등 강사), 정주희(제주대 교수)의 새롭게 창작된 작품을 전남대 나윤주 교수,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악장 이종만과 수석 정은지, 주민혁, 엄광용, 그리고 이후성, 이준, 송애리와 목포시립교향악단 수석 권새롬, 피아니스트 정민정, 지휘 이현민으로 구성된 앙상블 루미나시아가 초연한다. 정현수 뮤직노마드 회장은 "결실의 계절 한가위를 앞두고 알차고 정성껏 마련한 이 음악회가 평안한 일상으로 회복과 지치고 힘든 모두를 위로하는 예술적 경험이기를 소망한다”며 "우리 시대 모든 세대가 공감하고 누리는 현대 음악의 아카이브, 나아가 미래로 나아가는 컨템포러리 클래식의 이정표가 되는데 이바지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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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류 특별전 "희귀 LP 음반으로 보는 한국현대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류 특별전 연계 토크콘서트가 9월2일 박물관 3층 다목적홀에서 열린다.이번 토크콘서트에서 근현대건축사를 전공한 김정동 목원대 교수가 자신이 소장한 희귀 LP 음반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전한다.김 교수는 본인 음악 편력 뿐아니라, 소장 음반 중 엄선한 음반 66개의 레코드재킷 사진과 수록곡을 해방, 6·25전쟁, 새조국건설과 수출, 남/북의 노래, 88올림픽노래 등 총 7개 주제로 분류해 현대사를 이야기한다.소개되는 LP 음반 중 '종점/잘있거라 日本땅 : 이봉조 작곡집', '잘있거라 東京 : 임화춘 vs 신화자' 음반이 희소성이 있다. 현대사측면에서는 이승만대통령의 제2대 대통령 취임식 기념사가 수록된 '싸워라 이겨라 고국동포여!' 음반이 주목할 만하다. 강연 후 이어지는 공연에 한민국역사박물관 클래식공연단이 편곡한 정훈희의 안개, BTS의 IDOL, 클래식 1곡을 연주한다.오는 9월3일 막을 내리는 한류특별전은 오는 10월 초 문경석탄박물관에서 지역순회전으로 다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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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주년 광복절 기념 좌담회…"역사적 진실과 상식의 공간으로 재출발"문화체육관광부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16일 제78주년 광복절 기념 좌담회를 열었다. 원로부터 미래세대까지 세대를 초월해 한자리에 모여 광복의 의미를 되새기고,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보여주는 공간으로서 역사박물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를 가졌다. 박보균 장관은 인사말에서 "대한민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세계사의 경이로운 성취다. 하지만 지난 정부 시절, 그 기적의 역사를 자학적‧패배주의적 시선으로 재단하고, 어설프고 독단적인 색깔을 입힌 전시물들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득세했다. 이제 역사박물관은 편향과 변조, 왜곡과 비정상의 역사 인식과 전시품을 퇴출하고 역사적 진실과 상식으로 복귀, 재출발하게 됐다.”라고 강조했다. 행사는 원로부터 미래세대까지 함께 하는 좌담회, 장관이 직접 도슨트가 되어 한미동맹 및 근현대사를 설명하는 전시 관람 순으로 진행되었다.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손병두 시엔비시코리아(CNBCKOREA) 회장이자 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데이비드 린튼 한동대 교수, 라힐 아마도바 역사박물관 외국인 객원해설사, 문화체육관광부 MZ 드리머스이자 전 수영 국가대표인 임다연 씨 등이 참석했다. 한글문화연대 공동대표이자 늦깎이 사학 박사로 유명한 연예인 정재환 씨가 사회자로 행사를 진행하였다. 역사박물관 김진현 이사장은 "역사박물관은 제3세계 국가들의 근대화 역사에서 유일한 성공사례이자 독특한 성과를 쌓아온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표현된 공간”이라며, "국내외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진실에 기반한 전시가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손병두 회장은 "광복 이후 우리 경제의 위대한 리더들이 나타났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발전이 가능했다.”라고 한국의 산업화 역사를 반추했다. 독립유공자 윌리엄 린튼 씨의 증손인 데이비드 린튼 교수는 "광복절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려던 외세로부터 해방된 날이다. 우리 모두 자유와 독립에 대한 새로운 위협을 경계하고 이에 맞서서 행동을 취함으로써 선조들의 희생을 기리고 의무를 다하자.”라고 말했다. 역사박물관에서 외국인 객원 전시해설사로 봉사하고 있는 라힐 아마도바는 유창한 한국어로 "대한민국은 6․25전쟁 이후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나라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해설을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세계 각지에서 방문하는 외국인들과 나누는 것에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보균 장관은 1일 도슨트가 되어 한미동맹 특별전시, 한국 현대사 상설전시 속의 결정적 순간들을 생동감 있게 해설했다. 역사박물관은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한미동맹의 역사를 돌아보는 전시로 지난 4월 개막한 특별전 <같이 갑시다 We Go Together>에 이어, 외교·안보, 문화예술, 민간교류 등 한-미 양국 관계의 역사를 다각도로 조망하는 특별전을 7월부터 열고 있으며, 오는 9월 한미동맹 70년을 총결산하는 전시를 추진 중이다. 역사박물관은 지난해 5층 상설전시 역사관의 정부 수립, 6.25 한국전쟁 관련 내용을 개편한 데 이어, 올해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중심축인 산업화에 대한 전시내용을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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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영웅 특별사진전 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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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에 보답하는 우리들 이야기’…보훈콘텐츠 공모전 개최국가를 위해 희생·헌신하신 분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직접 만든 콘텐츠로 표현하는 공모전이 열린다. 국가보훈부는 11일부터 오는 10월 10일까지 6·25전쟁 정전 70주년 및 제78주년 광복절 계기 ‘제27회 보훈콘텐츠 공모전’을 개최한다고 밝혔다. 공모전 주제는 독립·호국·민주·공익수호 등 보훈 관련 분야로,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운동, 6·25전쟁 등에서 빛났던 호국정신, 4·19혁명 및 5·18민주화운동, 6·25전쟁 당시 참전한 유엔(UN) 22개국에 대해 감사를 전하는 내용 등이 대표적인 예다. 공모전은 전 국민이 참여할 수 있는 영상·그림·문예·인공지능(AI) 활용 콘텐츠 4개와 UN참전국 학생 등을 대상으로 하는 정전 70주년 기념 국제보훈콘텐츠 등 모두 5개 부문으로 진행된다. 영상은 10분 이내 자유형식, 그림은 포스터와 카드뉴스·그림책·소셜툰, 문예는 시·추모헌시와 단편소설, 수필(보훈수기), 동화 및 표어·주제(슬로건)를 공모한다. 또 국제보훈콘텐츠는 유엔 참전국 학생 등이 제작한 시·산문·슬로건·영상, 인공지능 활용콘텐츠는 다양한 인공지능 도구를 활용해 만들어진 포스터·영상을 공모한다. 특히 국제보훈콘텐츠 부문은 정전 70주년 계기 유엔 참전국과 호국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올해 신설됐다. 인공지능 활용 콘텐츠 부문은 4차 산업혁명과 초거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급변하는 콘텐츠 제작환경을 반영하기 위해 특별부문으로 신설하고 새롭고 혁신적인 보훈문화콘텐츠를 공모할 예정이라고 보훈부는 설명했다. 영상·그림·문예 부문의 경우, 초등부와 중·고등부, 일반부로 구분해 국민 누구나(개인 또는 단체) 응모할 수 있다. 공모전 누리집을 통해 작품을 제출하거나 공모전 운영사무국에 우편으로 보내면 된다. 작품이 접수되면 3차례에 걸친 전문가와 누리꾼 심사를 통해 70점을 선정해 오는 12월 시상하고 수상자에게는 보훈부 장관상과 모두 6540만원 상당의 상금을 수여한다. 당선작은 향후 보훈문화 학습 콘텐츠나 일상 속 다양한 공간에 전시해 보훈문화를 확산하는 데 활용될 예정이다. 기타 궁금한 사항은 운영사무국(1800-9987)에 문의하거나 공모전 누리집(http://보훈콘텐츠.kr)에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장정교 보훈부 보훈문화정책관은 "정전 70주년 및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아 추진되는 보훈콘텐츠 공모전에 많은 분이 참여해 영웅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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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한국전쟁과 아리랑(下) <br>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 코리아# "UN참전 군인들은 애환이 담긴 애조의 아리랑을 전쟁 참상의 현장에서 가슴에 담았다. 일부는 아름다운 한국처녀의 아리랑으로, 일부는 처참한 어린 고아의 아리랑으로, 또 어떤 군인은 승전가 아리랑으로 담았다. 이들에게 아리랑은 영원한 한국 참전 인식표(認識票)이다.” # "유엔군은 한국군 전우에게 아리랑을 배웠고, 나라마다 다른 군가 대신 아리랑으로 연대하였다. 아리랑이 행진가와 진혼곡으로도 연주되기도 하여 한국의 국가로 아는 군인들도 많았다.” # "참전 유엔 정보 담당 군인들은 오끼나와 기지에서 기초적인 생활어와 아리랑을 배웠다. 한국전 포로 식별을 위한 정보교육이었다. 포로 중 아리랑을 부르지 못하면 중공군이고, 아리랑을 잘 부르면 북한군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또한 전투 중 고립되었을 때 아리랑을 부르면 한국인들이 공포심이나 거부감을 갖지 않고 보호해 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유명한 재즈 뮤지션 오스카 페티포드는 우연히 들은 아리랑에 영감을 받아 귀국하여 째즈 ‘아디동 부르스’을 취입해 인기를 얻었다. 오스카 페티포드는 40년대와 50년대 초 미국 재즈계에서 베이스와 피아노 연주자로 유명하였다. 그는 1953년 초 일본 오끼나와 미군기지에 위문공연을 왔다 한국 위문공연을 하고 있는 미국 뮤직션들과 합류하여 귀국하기 위해 인천의 야전 부대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야전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 밖에 있던 한국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부는 노래를 듣었다. 일을 본 뒤 통역병에게 휘파람 연주에 대해 물었다. 이 때 ‘아-리-랑’을 ‘A-DEE-DONG’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가 취입한 SP음반에는 연습곡(take) 2곡까지 수록하여 처음 들었던 당시의 영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 "지난 4월 24일 90세로 별세한 룩셈부르크 레미히 성당의 질베르 호펠스(Gilbert Hauffels)씨의 장례식에는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인구 20만의 나라에서 100명이 파병된 군인 중 19세의 청년으로 1952년 3월 참전하였다. 최후까지 휴전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또한 철원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격전을 벌인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전투에서 생존한 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의 전투에서 고지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전투로 포탄 27만발로 ‘395 고지가 무너져 내려 마치 누워 있는 흰말’(白馬高地)로 보일 정도로 되었다는 최고, 최후의 전투였다. 그는 조카에게 남긴 유언장에 ‘아리랑을 들려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아리랑은 룩셈부르크 한인회 박미희 회장이 불렀고, 반주는 참전 후 재직한 세관의 관현악단이 맡았다. 이 나라도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미국 등의 우방국 참전으로 해방이 된 역사를 갖고 있다. 그의 한국전 참정 일기는 룩셈부르크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 "전우들을 위해 아리랑을 부르겠다.- 6·25 당시 미 해병대 병장이던 영국 참전 용사 콜린 새커리(93)옹이 부산에서 열린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1950년 9월 19세의 청년으로 영국군 제30야전포병대 소속 포병으로 참전했다. 같은 소대 전우 4명을 잃고 327고지 전투에서 생환했다. 4명의 전우가 잠든 부산 UN공원에서의 기념식에 그들을 위해 아리랑을 부르겠다는 의사에 따른 것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배로 부산에 도착했을 때 뜻은 모르지만 선율이 너무나 애잔하고 아름다워 금방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 한국전을 생각할 때마다 아리랑을 흥얼거렸다고 한다. 이제 혼자의 흥얼거림이 아닌 세계를 향해 평화를 기원하며, 전우의 죽음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부른 아리랑이다.” # "70년 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서명식을 마친 후 유엔군 군악대가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한국전쟁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는 노래이다. 지루하고 적군의 전략으로 오르내린 휴전 회담은 유엔군을 지치고 격분시켰다. 가장 길고도 이목을 끈 국제적인 정전 협정 조인식임에도 악수도 없고, 박수도 없고, 웃음기도 없는 조인식이었다. 그리고 동서 문을 통해 갈라졌다. 그런데 문을 나서는 순간 양측의 군악대가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한민족이며, 전쟁의 최후 종결 주도자도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적과 동지가 공감한 결과이다. 아리랑이 남북간의 만남에서 연주되는 이유이다. 이제 아리랑 연주는 종전의 순간일 것이다. 그때는 악수하고 박수치고 웃으며 맺는 조인식이며 부등켜 함께 합창하는 아리랑일 것이다. 그 아리랑을 염원한다.” 룩셈부르크 아리랑 *유언장에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아리랑을 좋아했던 호펠스 씨는 아리랑을 들으며 떠나셨다. 인구 2o만의 룩셈부르크가 6.25 전투에 100명을 파병했다니, 그동안 몰랐는데 놀랍고 감동스럽다. 여러 나라의 넘치는 도움을 받고 선진국으로 우뚝선 대한민국이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데 결코 인색해선 안될 것이다. 호펠스씨의 명복을 기원한다 아리랑의 국제화가 이뤄진 게 6·25 전쟁부터다. 한민족의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미 7사단은 아리랑을 사단 공식 행진곡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1951년 위문공연 차 방한한 유명 재즈 가수 오스카 페티포드는 우연히 아리랑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 앨범을 발매해 인기를 모았다. ‘아디동 블루스’란 이름인데 아리랑을 아디동으로 오인한 것이다. 수많은 용사들이 종전 후에도 아리랑을 잊지 못했다. 지난 4월 24일 별세한 룩셈부르크의 질베르 호펠스씨는 "장례식 때 꼭 아리랑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6·25 당시 미 해병대 병장이던 이는 지난해 한국 정부로부터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으며 아리랑을 불렀다. 오늘 부산에서 열리는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직접 아리랑을 부를 예정이다. 참전 용사 60여명이 참석한다. 70년 후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남한에서 울려퍼질 아리랑을 듣는 노병들의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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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아리랑’ 부른 참전용사 '콜린 태커리', 명예보훈장관 위촉영국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d Talent) 우승자이자 정전협정 70주년 및 유엔군 참전의날 기념식에서 아리랑을 열창했던 콜린 태커리(93세, Colin Thackery) 6·25전쟁 영국군 참전용사가 대한민국 명예보훈장관이 된다. 국가보훈부는 "28일 오후 4시 30분, 서울지방보훈청 박정모홀에서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를 제2호 명예보훈장관으로 위촉한다”고 밝혔다. 국가보훈부의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프로그램으로 초청되어 지난 24일(월)부터 29일(토)까지<5박 6일> 일정으로 방한 중인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는 19세 때 한국전 출전 명령으로 갓 결혼한 아내를 남겨두고 1950년 9월 제45야전포병연대 소속 포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327고지 전투 등에서 중공군과 싸운 참전영웅이다. 또한,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는 89세인 2019년 영국의 노래 경연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 최고령 참가자로 출연해 단 3곡으로 우승하며 국민 스타가 되었다. 지난 2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영국 첼시왕립병원 위문 당시, 태커리 참전용사가 아리랑 공연을 즉석에서 불렀고 이에 감탄한 박장관의 제안으로 기념식 아리랑 공연이 성사되었다. 지난 27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22개국 참전국 정부대표 등 4천명이 참석한 "정전협정 70주년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 무대에 올라 연합합창단과 함께 아리랑을 편곡한 ‘어메이징 아리랑’을 열창해 관중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명예보훈장관은 국가보훈부가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유엔참전국의 명망 높은 인사들을 위촉해 유엔참전용사들의 명예선양과 권익증진에 기여하기 위한 제도로 작년 9월 ‘한국의 사위’로 불리는 래리 호건(Lawrence Hogan) 미 메릴랜드 당시 주지사가 1호 명예보훈장관에 위촉된 바 있다. 이날 위촉식에 앞서 박민식 장관은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와 환담을 나누며 6·25전쟁에 참전해 대한민국의 자유수호를 위해 헌신한 테커리 참전용사에게 존경을 표하고 정전70주년 행사 초청에 응해준 것에 감사를 전했다. 또한, 고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명예보훈장관’으로서 유엔참전의 인연을 이어나가는 상징이 되어 건강하게 오래오래 활동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박민식 장관은 위촉식에서 ‘한국전 참전용사 명예선양에 힘써 주신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귀하를 대한민국 명예보훈장관으로 위촉하오니, 한국전 참전용사 명예선양이라는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계속적인 지원을 당부 드립니다.’라고 적힌 위촉장과 감사의 마음을 담은 자개 보석함을 태커리참전용사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영국의 국민 스타인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를 명예보훈장관으로 위촉하게 되어 기쁘다”면서 "재방한 감사만찬과 기념식장에서 불러주신 ‘아리랑’은 함께 참전한 전우들과 이를 지켜본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강조하며 "귀국하신 후에도 유엔참전용사들이 맺어준 대한민국과의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노래하는 명예보훈장관’으로서 오래오래 활동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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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서 울려퍼진 유엔참전용사의 아리랑 세레머니지난 27일 저녁 ‘피란의 수도’ 부산에서 아리랑이 울려퍼졌다. 70여 년 전 이국 땅에서 전쟁 속으로 뛰어들었던 세계 각국의 청년 군인들이 이제 노병이 되어 다시 찾은 대한민국에서 부른 ‘어메이징 아리랑’이었다. 아리랑 공연은 이날 부산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 및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의 하이라이트였다. 행사에 참석한 유엔참전용사들은 전광판 속 한글의 영어식 읽기 표기로 된 아리랑 가사를 읊으며 나지막히 함께 불렀고, 모든 참석자들이 감동했다. 국가보훈부는 유엔군참전의 날 및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기념해 24일부터 29일까지 5박 6일간의 일정으로 유엔참전용사와 가족 등 200여 명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재방한 행사’를 진행했다. 처참한 상흔만이 남아있었던 70여년 전, 많은 한국인들이 쉴새 없이 흥얼거렸던 아리랑을 따라부르며 익히게 된 유엔참전용사들은 낯선 나라였으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볐다. 미국, 영국, 캐나다, 튀르키예, 호주 등 총 22개국에서 약 200만 명(연인원)에 이르는 유엔군들이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포화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한국을 다시 찾은 유엔참전용사들은 이 나라의 눈부신 사회·경제·문화적 발전과 커다란 환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재방한 행사’ 일정 중 27일 본격적인 기념식 행사를 앞두고 유엔기념공원과 롯데호텔 부산에서 유엔참전용사와 후손 등을 만나 소회를 들어봤다. "이것은 기적이다. 정말 ‘원더풀’하다” 27일 롯데호텔 부산에서 진행된 유엔참전용사 4인 합동인터뷰에서 이처럼 가장 먼저 소감을 전한 미국인 유엔참전용사 도널드 리드 씨는 72년 전인 1951년 8월 18살의 나이에 해병대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19살때까지 1년간 전방에서 벌어진 전투 3개에 참여했는데, 특히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가 1951년 8월 31일부터 9월 20일까지 펀치볼(해안분지)을 공격해 확보한 전투인 ‘펀치볼 전투’에도 참전했다. 이같은 한국과의 인연 덕분이었을까, 리드 씨는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 한국인 여성과 인연이 닿아 결혼까지 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1951년 9월 한국을 떠날 때 한국 땅은 굉장히 황폐했고 절대 발전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이후 굉장한 발전을 이뤄냈다”며 "한국인들의 마음과 정신력 때문에 이런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국 성공의 원동력일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현재의 분단된 한반도 상황에 대해 "6·25전쟁을 경험한 한 사람으로서 북한 사람들이 굶주림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할지 안다. 북한도 어서 평화를 찾아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며 "통일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평화를 위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기꺼이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번 방문을 포함해 한국을 10번 째 방문한 리드 씨는 "올때마다 이런 환대를 받는 것에 대해 매우 감사하다”면서 "이렇게까지 참전용사에게 감사를 표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한국의 너그러움에 감사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보여준 커다란 환대, 결코 잊지 못할 것” 일본에서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부산에 도착해 참전했다는 영국인 참전용사 리차드 카터 씨는 전쟁 당시 임진각 근처에 배정받은 자신의 임무를 상세히 소개했다. 그는 "길을 순찰하고 부대원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것, 또 임진각 뒤에 있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며 "중공군이 내려오는지 두 개의 다리를 계속 감시했어야 했는데 다행히도 폭격을 당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날 6·25전쟁 참전 당시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져온 카터 씨는 "이게 부산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사진 한 장, 한 장을 소개했다. 1953년 부산에 도착했을 당시 트럭으로 이동하는 도중 촬영한 외곽지의 한 장면, 14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가막산 인근의 부대 내 군 텐트가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하게 설치돼 있는 장면, 적군 침입시 폭파해야했던 두개의 다리 모습이었다. 1954년 한국을 떠난 이후 처음 한국을 방문한 그는 "모두 한국에서 이룬 이같은 발전을 다른 사람들도 따라야 할 모범이라고 생각한다”며 "한국의 이런 성공은 결국 통일로 이뤄져야 한다”고 통일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특히 한국의 발전과 성장에 대해 연신 놀라움을 표한 카터 씨는 "유엔 참전국의 대표로서 한마디를 하자면, 이번 행사가 굉장히 잘 준비되어 있어 감사하다”면서 "한국이 보여준 커다란 환대, 결코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의 발전 믿을 수 없어…굉장히 기쁘다” 이번 재방한 행사로는 한국을 처음 방문한 호주인 참전용사 로널드 워커 씨는 1953년 왕립호주 제2대대 상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을 찾은 그해 9월, 그는 6.25전쟁의 대표적 격전지 중 하나로 꼽히는 후크고지 전투 등 전투에 투입돼 전장을 누볐다. 후크고지 전투는 휴전협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미국과 영연방군이 4차례에 걸친 중공군과의 격전 끝에 임진강 북단의 연천군 장남면, 백학면, 미산면, 왕징면 일대를 대한민국 영토로 귀속시킨 전투다. 후크고지란 이름은 격전지가 벌어졌던 지형이 후크(hook) 모양으로 생겼다는 이유로 붙여졌다. 워커 씨는 "전투 당시 미국군의 왼쪽 옆에서 방어하는 것이 임무였다”며 "평화협정이 맺어진 이후에도 감시를 풀지 않고 언제든 진격할 준비를 했었다”고 당시 맡았던 임무에 대해 설명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성공을 이룬 요소에 대해서는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한국의 재건에 참여했던 것, 다른 나라들이 이에 대해 많이 배워야 한다”며 "정말 훌륭하고 믿을 수 없다. 이러한 발전을 보게 된 것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전쟁 당시 군인들을 도왔던 조적성, 김진태, 김일송이라는 이름으로 추정되는 세 인물을 언급하며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기도 했다. 이날 합동인터뷰에 참석한 이들을 비롯한 유엔참전용사 60여 명은 오전 6·25전쟁 희생자 11개국 2300여 명의 유해를 모신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참배했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폭염을 뚫고 참배에 함께한 워커 씨는 유엔기념공원에 대해 "잘 정비돼 있어 굉장히 놀랐다. 한국은 이런 유엔 묘지가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할 것”이라며 "유엔 병사들을 항상 기억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했다. 홍콩에 주둔했다가 한국으로 넘어와 6·25전쟁에 참전했던 캐나다인 참전용사 윌리엄 로버트슨 씨는 전쟁 당시 친하게 지냈던 전우의 묘비에 캐나다 보훈의 상징인 ‘포피(Poppy)’ 모양의 뱃지를 올려뒀다. ‘쓰러진 병사’라는 꽃말을 가진 포피는 로버트슨 씨의 캐나다 고향마을에 사는 10살 소년 ‘키오’가 만든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정말 아름다운 세레머니였다”며 "이런 좋은 기회를 만들어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참전용사 후손, "아버지, 다시 참전할 것이라 말해” 유엔기념공원 참배는 들끓는 무더위 속에서도 전우를 찾은 참전용사들의 의지 덕분에 오전 내내 진행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인 유엔참전용사 이반 홀사우센의 아들인 케이스는 이번 재방한 행사로 한국을 찾게 돼 매우 기쁘다고 전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6·25전쟁에 대해 많이 이야기를 듣고 사진도 보았다”며 "아버지는 파일럿으로 참전했는데, 당시 전쟁의 긴장감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곤 하셨다”고 말했다. 또 "아버지와 그의 동료들은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는데,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겨우 22살이었다”며 "아버지는 약 75개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한국 사람들은 유엔군의 희생에 대해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며 "아버지는 오래 전, 다른 인터뷰에서 다시 또 참전하겠다고도 말하셨다”고 아버지의 한국에 대한 애정을 전하기도 했다. 튀르키예 유명 크리에이터, 보훈부 초청으로 참석…"엄청난 경험” 이날 튀르키예 유엔참전용사들을 대신해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어있는 튀르키예 유엔참전용사들에 헌화한 유튜브 크리에이터 루히 씨는 보훈부 초청으로 이번 재방한 행사에 함께 했다. 1421만여 명의 구독자 수를 보유한 유튜버이자 독립 다큐멘터리 감독인 루히 씨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색적인 곳을 방문하거나 다양한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한 영상 콘텐츠로 대중과 만나고 있다. 특히 한국어, 영어를 포함한 14개 언어의 자막과 더빙도 제공하고 있다. 그는 "대부분 참전용사들이 22~23세였는데, 젊은 나이에 열망을 뒤로 한 채 헌신했다”며 삶에 대한 꿈과 욕심을 모두 뒤로 한 채 참전해야 했던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예우를 표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들과 튀르키예 사람들 간의 어떤 연결성을 느낀다. 전쟁과 역사에 대해 구독자들이 알고 서로를 이해했으면 한다”며 "그때 당시의 이야기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전했다. 루히 씨와 함께 방한한 12만여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버 크리에이터 아흐멧 씨도 이에 대해 동감했다. 그는 "여기는 매우 감정을 자극한다. 묘역에서 내 이름과 같은 이름을 보았는데, 이 점은 나를 매우 다르게 느껴지게 한다”며 "참전용사들은 더욱 예우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아흐멧 씨는 "한국에 3일 정도 머무르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됐지만, 한국 문화에 대해 더 잘 알고 싶다”며 "내 자신이 마치 집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나에게 엄청난 경험”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의 할아버지(참전용사)들이 생전에 한국을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고 전했다. 6·25전쟁 기간 4만 1000여 명의 유엔군이 전사하고 11만 명이 다치거나 포로가 되는 큰 희생이 있었다. 유엔군이라는 이름 아래 전 세계 청년들이 인생의 가장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젊음과 꿈을 뒤로 한 채 낯선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전장을 누벼야 했다. 7월 27일은 이같은 유엔참전용사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는 법정기념일, ‘유엔군 참전의 날’이다. 매년 돌아오는 7월 27일,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과 헌신한 그들에 대한 진심어린 경의를 잊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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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 '두 얼굴의 평화, DMZ' 특별전 개최경기문화재단 경기도박물관이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두 얼굴의 평화, DMZ' 특별전을 오는 10월15일까지 선보인다. 1953년 7월 27일 경기도 북부의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된 것을 기념하고,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의 참상과 정전협정, 그리고 정전협정의 결과로 만들어진 비무장지대(DMZ)에 대해 조명해보는 특별기획전이다. 행사는 오는 10월15일까지 진행된다. 전시는 지난 2020~2021년 문화재청·경기도·강원도가 합동으로 진행한 '한반도 비무장지대 실태조사' 성과와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비무장지대 내에서 발굴·수습한 영웅들의 유품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제1부 ‘끝나지 않은 전쟁’, 제2부 ‘두 얼굴의 DMZ’, 제3부 ‘내일을 위한 기억’, 제4부 ‘DMZ 실태조사 성과 순회사진전’ 등 네 부분으로 나눠진행된다. 제1부 '끝나지 않은 전쟁'에서는 6·25전쟁과 정전협정을 다룬다. 6·25전쟁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무기인 M1 소총과 '따발총'이라고 불리는 소련제 슈파긴 기관 단총, 전쟁 때 뿌려진 삐라, 유엔군이 돌아갈 때 기념으로 가져간 아리랑스카프 등을 전시한다.또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정전협정 본문(복제본)을 볼 수 있다. 정전협정서는 유엔군 대표와 북한군·중공군 대표가 서명, 정전협정서 원본은 미국과 중국 북한에 있다. 제3부 '내일을 위한 기억'에서는 6·25전쟁에 전투부대와 의료지원을 해준 국제연합군의 22개 국가의 희생을 기억하는 국내의 기념비를 소개한다.이와 함께 70년 전 정전협정 지도를 통해 사라진 마을과 문화유산에 대한 정보도 전시한다. 비무장지대가 탄생하면서 사라진 마을은 총 2개 도, 9개 군, 35개 면, 116개 행정리와 401개의 부속마을이다.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된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 전쟁·분단·이산의 아픔을 노래한 대중가요, 전쟁을 다룬 영화, 판문점과 비무장지대를 기록한 사진집, 다시 가 보고 싶은 '그리운 금강산' 관련 유물과 자료, 비무장지대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실태조사 자료 등도 전시한다. 제4부는 'DMZ 실태조사 성과 순회사진전'이다. DMZ 실태조사 때 촬영한 가장 최근의 사진들을 경기도박물관 갤러리에서 따로 선보인다.2009년 국방부 의뢰로 최초로 휴전 이후 비무장지대 기록 사진을 촬영한 박종우 작가의 다큐멘터리 사진도 전시된다. 이 사진들을 통해 70년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비무장지대 안의 감시초소와 전방을 수색하는 병사 모습, 그 곳에 서식하는 식물과 조류, 포유류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무장지대의 원시적 아름다운 자연 풍경 아래에는 남과 북이 겪은 전쟁 잔해와 아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시 기간 중에는 정전협정 70주년 학술포럼과 전시연계 전문가 특강 등 다양한 행사도 열린다. 전시연계 프로그램으로는 통일부가 제작한 ‘DMZ 메타버스, 사라진 마을’이 상설돼 있다. 6.25전쟁 이전 DMZ에 있었던 400여 개의 마을 중에서 연천 고랑포리․항동리, 철원 외촌리․유정리, 양구 문등리, 고성 대강리․사비리 등 큰 규모의 마을을 메타버스로 구현한 프로그램이다. 경기도박물관 관계자는 "비무장지대 땅 밑에 지뢰와 폭탄이 숨어있고 전사자의 유해와 유품, 문화유적과 사라진 마을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이들을 무심히 덮고 회복해가는 자연생태계의 모습을 통해 DMZ의 내일, 한반도의 평화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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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동맹70주년&정전70주년 기념, '제1회 동두천평화아리랑제' 팡파레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유엔 참전용사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6‧25한국전쟁에서 나누었던 동지애 및 인류애에 대한 기억을 소환했다. 27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는 국적이 다른 22개 유엔군 참전 용사들이 모였지만, 아리랑으로 하나 되는 모습이 연출됐다. 이날 하이라이트는 역시 참전 용사와 유엔 합창단이 함께 부른 ‘어메이징 아리랑’이었다. 무대 영상에선 각국 참전 용사들이 6‧25전쟁 때 불렀던 아리랑을 추억하며 한 소절씩 부르는 모습이 나왔다. 이날 '상생의 도시' 동두천시에서도 한미동맹70주년 및 정전협정70주년을 맞이하여 아리랑이 메아리쳤다. 27일 동두천시가 주최하고 (사)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가 주관한 '제1회 동두천평화아리랑제'는 한·미우호관계 발전과 나아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아리랑에 담아냈다. 10시 현충탑과 11시 자유수호박물관에서 동두천이담농악보존회(단장:김경수), 동두천아리랑보존회(회장:유은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이혜솔)이 함께하고, (사)아리랑연합회와 (주)국악신문이 후원했다. 김경수 지부장의 사회를 맡고 한국국악협회 동두천지부의 초혼무 '살풀이춤', 가야금병창 '아리랑', 동두천이담농악보존회의 '지신밟기'와 '비나리',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이담아라리', '동두천아리랑', '황석산아리랑',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아리랑'이 불려졌다. 오전 10시 동두천 현충탑앞에서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이사가 동두천평화아리랑제추진단 창립 선언문을 낭독했다. 다음은 선언문 중 한국전쟁 때 남북이 양측에서 각각 불렀던 아리랑이다. 사발그릇 깨어지면 두세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 한덩어리 된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잘넘어간다('정선아리랑' 1절)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 '음탄(音彈)아리랑' 1절) 백두산봉우리 깃발 펄펄 날리고 제주도 한라산 유격대깃발 올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빨지산아리랑' 1절, ‘항미원조 전쟁 군가집’ ) 11시 자유수호박물관에서는 식전행사에서 한국전쟁시 세계평화를 위해 참전한 유엔군 및 순국선열의 희생을 추모하는 추념제를 올리고, 지신밟기로 시작하여 '아리랑'을 헌정했다. 주최측은 "한미동맹 70주년과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한미우정을 상징하는 아리랑을 통해 더욱 한미우정을 강화하고,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상생의 도시' 동두천시의 정화와 치유를 회복하는 정주년이 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김경수 회장은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이하여 아리랑으로 이 땅을 정화시키고 '동두천시를 새롭게, '시민을 힘나게', 회복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동두천'의 서사를 주제로 한 지속적인 전통문화 활동을 통해 동두천시의 이미지를 새롭게 전환시키는 효과를 기대한다. 특히 이번 행사를 통해 한국전쟁에 참가한 22개국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호국영령들에게 아리랑을 바친다"라고 밝혔다. 또한 내년 2회에는 경기 북부 지역의 민·관·군과 다문화사회를 대상으로 아리랑으로 하나가 되는 문화예술 향유 기회의 장을 확대·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히겠다고 전했다. 유은서 회장은 "전국적 물난리로 행사가 축소된 이번 동두천평화아리랑제이지만, 우리 전 회원은 한마음을 모아 유엔 참전용사들과 순국선열들을 추념하며, 평화의 노래 '동두천아리랑'이 시민들에게 애창곡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전했다. 이혜솔 회장은 "동두천에 주둔한 미 7사단가로 불린 아리랑을 부르면서 감회가 새롭다. 미군들이 널리 알린 이 아리랑이 미국 뮤직션들이 편곡하여 여러 버젼의 아리랑이 음반으로 나왔다고 한다."라고 전했다. 정전 70주년이라는 정주년을 통해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담보하는 동두천의 서사는 '상생의 도시 동두천'으로 거듭날 수 있다. 상생의 도시 동두천은 세계 유네스코가 주목한 아리랑의 3대정신(대동 해원 상생)을 구현할 수 있는 중추적 역활을 수행할 수 있는 서사를 담보하고 있다. 동두천 보산리에 주둔한 미군 7사단이 매일 아침마다 불렀던 단가 '아리랑', 1964년 안흥리에 미군 7사단이 지어준 '아리랑다리', 미군 위안부 모임 '아리랑'은 동두천 시의 역사이고 서사이다. 그만큼 전통문화와 외래문화가 충돌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요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 아리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산리에 1971년까지 2만6천명이 주둔한 미군들이 단가로 아리랑을 불렀고,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들에게 아리랑악보가 담긴 실크 스카프를 고국으로 보냈다. 어제 국가보훈부에서 이 '아리랑스카프'를 복원하여 유엔 참전용사들에게 선물을 한다고 밝혔다. 아리랑은 전장에서뿐 아니라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 조인식을 마치고 귀환하던 유엔대표단과 북한 측이 사열할 때도 동시에 각각 연주된 곡이다. 이날 동두천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부여하여 아리랑이 불러진 것은 역사적 의미를 시사한다. 아리랑은 미래의 노래이고 평화를 상징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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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유엔 참전 22국 전우애 상징 ‘아리랑 스카프’ 70년만에 복원6·25전쟁에서 22개국 유엔 참전용사들과 한국군을 하나로 묶은 연대의 상징인 ‘아리랑 스카프’가 70년 만에 복원됐다.25일 국가보훈부는 25일 "1951년 제작돼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 참전용사들이 고국의 어머니와 부인에게 보낸 인기 기념품 아리랑 스카프를 70년 만에 원형으로 복원했다”고 밝혔다. 6·25전쟁 중 여러 나라에서 온 연합군은 우리나라의 아리랑을 들었고 함께 생사를 넘나드는 한국군 전우에게서 아리랑을 배웠다. 서로 다른 국적의 유엔연합군은 나라마다 군가(軍歌)가 달라 전장에서 함께 배운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서로 하나가 되어 연대했고 미 7사단은 군가로도 채택하였다. '아리랑 스카프'는 6·25전쟁 당시 참전한 외국 군인들을 위한 기념품으로 제작되어 처음에는 아리랑 가사가 없는 형태였으나 이듬해인 1951년부터 아리랑 악보와 가사가 실리게 되었다. 한국 전통민요 아리랑은 6·25전쟁 당시 한국군과 유엔연합군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매개 역할을 했다. 복원한 스카프는 흰 비단에 용 한 마리가 휘감고 있는 한반도 지도와 참전국들 부대 마크 사이에 아리랑 악보와 영어로 번역된 ‘A ARIRANG SONG’ 제목이 새겨 있고 태극기 등 참전국가 국기가 둘러져 있다. 참전용사들이 하나로 뭉쳐 있는 듯한 형상으로 마치 콜라주 작품처럼 보여 미학적 완성도가 높고 1951년 원안 스카프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될 만큼 역사적 가치도 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아리랑 스카프는 동맹국의 위대한 연대를 알리는 상징물로 자유의 가치, 연대의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복원했다”고 말했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아리랑 스카프는 미국 클라이드 부인의 것이다. 부인은 1952년 아들 클라이드 상병이 어머니 건강을 염려하며 편지와 함께 보낸 이 스카프를 결국 돌아오지 못한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손에 쥐고 아리랑 가사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2023년 아리랑 스카프’는 기존 원안에 70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2023년 대한민국 현재 모습과 22개국 참전국가 국기를 모두 담아 그 의미를 더했다.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부산에 모인 22개국 참전국 대표에게 선물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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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국전쟁과 아리랑(上)한국전쟁 3년 1개월 2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 소련의 지령과 중국의 지원으로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다. 약 5년간의 체제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냉전 속의 이 체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후자는 수립이 되자마자 군사력을 확충하며 소련과는 ‘조소군사비밀협정’을, 중국공산당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인 2만5천명이 북한군에 인도됨으로서, 13만명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우월한 전세를 갖춘 북한은 통일을 내세워 선전포고(宣戰布告)도 없이 남침을 했다. 이렇게 전 38선상에 남침함으로서 촉발된 전쟁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UN 결의에 따라 국제사회가 개입하게 되었고, 미7사단 주력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함으로서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 9일만에 평양을 점령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교착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이 때부터 UN군 등에서 제한전쟁으로 휴전이 제기 되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으로 한민족은 너무나 큰 손실을 보았다. 정신적 피해는 제처 두고라도 인적 물적 손실은 물론, 많은 이산가족 발생 같은 고통은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다. 우선 인적 손실은 어느 전쟁보다 컸는데, 국군은 140여만 명, 북한은 약 329만 명, 유엔군은 약 15만 명의 손실을 보았다. 결국 남북은 무려 520만 명의 희생을 낸 것이다. 전쟁 피해, 희생은 이뿐만이 아니다. UN 참전군들의 희생도 크다. 참전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룩셈부르크 16개국이 유엔군으로서 약 190만 명의 전투병을 파병했으며,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가 야전병원, 병원선 등의 의료지원을 통해 참전했다. 이들의 인명 희생도 막중했다. 또한 많은 포로들의 발생도 그 처리로 갈등을 겪었다. 한민족이 남북군과 중공군에 동족임에도 편입되었고, 16개국 UN군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포로 교환 문제는 휴전회담 기간 내내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 포로 중에는 강제로 징집되어 많은 투항병이 발생하였고, 한국군 포로가 재 강제 징집 되어 북한군이 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중공군 포로 중에는 송환을 거부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UN '포로교환문제소위원회'와 '국제적십자조사위원회'는 곤경에 처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세 가지 문제로 급진전하게 되었다. 하나는 북한 지역에 전염병의 발발한 사실이고, 둘은 1952년 12월 유엔총회에서 120일간 설득하여 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 4개국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하게 하자는 합의를 하였다. 마지막은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이런 경과로 휴전은 급진하였다. 드디어 1951년 7월 미국의 릿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김일성과 평더화이 중공군사령관이 개성에서 회담이 시작되어, 군사분계선 설정, 세부사항 일괄타결, 전쟁포로 문제 합의와 협정 체결이 된 것이다.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협정을 맺어 전쟁은 중지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대(對) UN군 측의 미국이 대표하여 협정에 서명함으로서 휴전이 되었다. 3년 1개월 2일의 전쟁은 휴전 체제로 들어 간 것이다. 이로서 포로교환 등의 여진이 남았지만, UN군은 해체되어 참전 군인들은 각국으로 귀국하였다. 남북한은 전선에서 군인들과 무기를 철수하였다. 그리고 전쟁 복구에 들어갔다. 처참한 동족상잔 한국전쟁은 귀국 참전 군인들에 의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로 ‘한국은 전쟁의 나라’, ‘한국은 고아의 나라’, ‘한국은 아리랑의 나라’ 같은 인상비평적(印象批評的) 표현들이 회자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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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70주년에 참전용사 '콜린 태커리' 아리랑 부른다영국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d Talent) 우승자인 콜린 태커리(93세, Colin Thackery) 6·25전쟁 영국군 참전용사가 국가보훈부의 유엔참전용사 재방한 행사에 초청되어 아리랑을 열창한다. 24일부터 29일까지 5박 6일 일정으로 방한해 부산에서 개최되는 7.27 정전협정 70주년 계기 행사에서 만날 수 있다.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의 방한은, 지난 2월 영국을 방문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런던의 첼시왕립병원에서 정부를 대표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헌신한 7명의 유엔참전용사에게 감사를 표하며 ‘정전협정 70주년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 공식 초청장을 전달해 이루어졌다. 당시, 태커리 참전용사는 본인의 브리튼슨 갓 탤런트 우승 경력을 소개하며 ‘아리랑’을 즉석에서 불러 박 장관을 놀라게 했다. 이에 박민식 장관은 "한국에 초청할테니 6·25전쟁 정전70주년 기념식에서 아리랑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고 태커리 참전용사가 이를 흔쾌히 수락해 정전70주년 계기 행사 아리랑 공연이 성사되었다.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는 재방한 행사의 둘째 날인 7월 26일(수) 시그니엘부산 호텔에서 유엔 참전국 정부대표단, 주한참전국 대사 등 3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는 ‘유엔참전용사 감사만찬’, 27일(목)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6·25참전유공자, 학생, 시민 등 4,000여명이 참석하는 ‘정전협정 70주년 및 유엔군 참전의 날 기념식, 28일(금) 영국 대사관 주최 ’참전용사 초청 리셉션‘ 행사 무대에 올라 ‘아리랑’을 부를 예정이다.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는 15세에 영국군에 입대해 19세 때 한국전 출전 명령으로 갓 결혼한 아내를 남겨두고 1950년 9월 제45야전포병연대 소속 포병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327고지 전투 등에서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운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는 함께 참전한 6명의 전우 중 4명의 전우를 잃고 참전 2년만인 1952년 고국으로 돌아갔고 전사한 4명의 전우는 현재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아리랑 공연에 대해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는 "영국에서 배를 타고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곳이 부산이었는데 당시 전장에서 부르던 노래가 아리랑이었고 전우들과 무슨 의미의 노래인지도 모른 채 기회가 될 때마다 함께 불러 이제는 한국을 떠올릴 때마다 아리랑이 생각난다.”며 "너무 아픈 기억이 많은 한국이었지만 아직도 우리를 기억해 감사를 전하는 한국에 다시 오게 되어 기쁘고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전우들을 위해 아리랑을 부르겠다”고 말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초청에 응해 고령에도 한국을 찾아주신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의 아리랑 노래가 행사에 참석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남아 오늘날 자유 대한민국의 놀라운 번영을 이뤄낸 유엔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이 잊혀지지 않고 미래까지 이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콜린 태커리 참전용사는 2019년 89세의 나이에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d Talent) 역대 최고령 출연자로 출연해, 우승해 우승상금 25만파운드(현재 한화 4억1천4백만원 가치)를 받아 국민 스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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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수원시, 호국문화제 '나는 솔저'경기 수원시와 경기남부보훈지청은 오는 21일 오후 5시 보훈재활체육센터(장안구 광교산로 71)에서 2023년도 호국문화제 '나는 솔저'를 개최한다. 19일 시에 따르면 이번 행사는 '같이 갑시다. Lead to peace(평화로 이끌다)'를 부제로 하는 호국문화제(구 나라사랑음악회)는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음악을 매개로 시민들에게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새겨 주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고취하는 행사다. 이날 행사는 정전 70주년 기념식으로 시작해 6.25 참전용사 인터뷰 동영상 상영, 나는 솔저 경연대회, 군부대 특별공연, 초청가수 공연 등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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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예산군, 윤봉길체육관에서 정전 70주년 기념 호국음악회충남 예산군은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위대한 헌신, 영웅의 자부심'을 주제로 15일 오후 5시부터 윤봉길체육관에서 호국음악회를 개최한다고 11일 밝혔다.이번 음악회는 충남서부호훈지청 주관으로 우리 고장의 호국영웅인 정긍모 제독, 김풍익 중령, 이장원 중위를 비롯한 호국영웅들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마련됐다.또한 군민에게 보훈 정신을 알리고자 공연, 제복의 영웅들 퍼포먼스, 판문점 입체퍼즐만들기, DMZ 소원종 등의 다채로운 체험이 진행될 예정이다.군 관계자는 "6·25전쟁 정전일인 7월 27일을 앞두고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세대에게 호국보훈의 정신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군민의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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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국립서울현충원, 정전 70주년 기념 호국음악회국립서울현충원이 6·25정전 70주년을 맞아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음악회를 진행한다. 서초교향악단의 클래식 연주와 배종훈 지휘자의 해설이 어우러진 이번 음악회는 ‘6·25전쟁 영웅들을 위한 팡파르(크라우스 곡)’을 시작으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서곡 ‘자유의 날개’, ‘군대 행진곡 메들리’ 등 정전 70주년을 기념하는 내용의 연주곡들로 진행된다.△바이올리니스트 백서연의 지고이너바이젠(사라사테 곡) 연주 △국악 그룹 케이페라 린 △팝페라 가수 고진엽등 다양한 레퍼토리의 협연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앞으로도 국립서울현충원은 품격 있고 사랑받는 다양한 문화 행사를 꾸준히 개최함으로써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계승하는 호국 추모 공원으로서 위상을 한층 더 높여나갈 계획이다. 음악회 관람을 원하는 사람은 25일까지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에서 사전 신청하면 된다. 음악회 관람권은 1인당 최대 5매까지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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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참전용사들 정전 70주년 맞아 한국 온다국가보훈부(장관 박민식)는 "정전 70주년 계기, 오는 24일(월)부터 29일(토)까지 5박 6일 일정으로 유엔참전용사와 가족 등 200명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재방한 행사를 진행한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재방한 행사는 정전 70주년 계기, 70년 전 대한민국을 지킨 유엔참전용사에게 정부 차원의 예우와 감사를 전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영웅들을 모십니다” 주제로 추진된다. 방한하는 참전용사와 유가족은 덴마크를 제외한 21개 참전국 200명으로 유엔군 참전의날이자 정전협정 70주년인 7월 27일(목)을 앞두고 24일(월)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다. 재방한 참전용사 중 최고령자는 미국의 해럴드 트롬(미국, 95세) 참전용사로, 1950년 미 육군 이병(PFC)으로 참전해 인천상륙작전 및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였다. 해롤드 씨와 함께 장진호 전투에 참전한 패트릭 핀 (미국, 92세)씨와 고든 페인 (영국, 92세)씨도 함께 방한한다.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꼽히는 후크고지 전투에 참전한 로널드 워커(89세), 렉스 맥콜(92세), 버나드 휴즈(92세), 마이클 제프리즈(90세, 이상 호주), 빈센트 커트니(캐나다, 89세), 피터 마시(영국, 90세) 참전용사도 방문단으로 내한하며 특히, 빈센트 커트니 씨는 11월 11일 ‘턴 투워드 부산’ 행사를 최초로 제안한 참전용사이다. 또한 4형제가 함께 6·25전쟁에 참전한 아서 로티(캐나다, 91세)씨와 그의 아들도 함께 재방한한다. 아서 로티씨 4형제는 6·25전쟁 정전 후 캐나다로 무사히 돌아갔고 다른 형제 3명은 현재 모두 별세하였다. 방문단에는 전쟁 당시 한국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을 기억하고 아직까지 찾고자 하는 참전용사도 있다.이번 초청을 통해 처음 방한하는 윌리엄 워드(91세, 미국) 참전용사는 전쟁 당시 부산 캠프에서 매일 자신의 빨래를 해주겠다던 12세 소년 창(Chang)을 찾고 있으며 에드워드 버커너(캐나다, 91세) 참전용사 역시 전쟁 당시 초소(Large Squad) 청소를 했던 ‘Cho Chock Song’이란 한국 소년을 만나고 싶어 두 사람 모두, 당시 찍은 사진을 국가보훈부로 보내왔다. 유엔참전용사의 가족 중에서는, 6・25전쟁에 미8군사령관으로 참전해 중공군의 공세를 꺾고 전선을 38도선 북쪽으로 북상시킨 제임스 밴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장군의 외손자인 조셉 맥크리스천 주니어(Joseph Alexander McChristian JR) 씨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월튼 워커’ 장군의 손자인 샘 워커 2세(Sam, S. Walker Ⅱ) 씨도 포함되었다. 재방한하는 참전용사와 가족은 지난 6일 보훈부가 인천국제공항공사(사장 이학재)와 체결한 업무협약에 따라 인천공항에 입국하는 순간부터 입국절차 간소화, 전용 출입국통로(패스트트랙) 등 최고의 예우와 공항내 전광판, 가로등 배너 등 감사 환영을 받는다. 방한단은 25일(화) 판문점 방문을 시작으로 26일(수) 유엔참전국 감사 만찬에 참석하고 27일(목) 부산 유엔기념공원 방문, 유엔군 참전의날 및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 참석, 28일(금) 전쟁기념관 방문의 공식 일정 후 29일(토) 출국할 예정이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유엔참전용사분들은 73년 전 발발한 전쟁에서 낯선 땅, 낯선 나라의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젊음과 목숨을 바친 진정한 영웅”이라며"대한민국의 놀라운 70년을 만든 주역인, 이분들이 재방한 기간 어떠한 불편함도 없도록 최고의 예우를 다하고 대한민국과 참전국, 더 나아가 세계의 젊은이들이 유엔참전용사의 숭고한 인류애를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국제보훈사업에 더욱 힘쓰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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